2008 8월1일자 파이낸셜 뉴스 -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문화탐험] (14) 시는 그림과 같이 , 그림은 시와 같이
작성자
hongjiyoon
작성일
2015-02-25 05:10
조회
825
http://www.fnnews.com/view?ra=Sent1301m_View&corp=fnnews&arcid=080731165151&cDateYear=2008&cDateMonth=07&cDateDay=31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문화탐험] <14> 홍지윤-시는 그림과 같이,그림은 시와 같이
2008-07-31 16:52:00
■인간의 몸은 사랑의 주체이자 객체
시와 그림의 통교를 시도 ... 회화의 관례에 저항
'인생은 아름다워'연작 유명 '붓질하는 음유 시인
이제까지 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오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랑을 빼먹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 소설가, 철학자, 화가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마르지 않는 샘처럼 사랑은 아직도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사랑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군주와 신하 사이의 사랑, 스승이 제자에게 베푸는 사랑….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역시 남녀간의 사랑이다. 햄릿과 오필리어 사이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 때문에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고 만 불행한 사랑의 표본이다.
그러나 사랑이 죽음을 불러오는 것만은 아니다. 예술가에게 있어 사랑은 영감의 원천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파블로 피카소. 그는 생전에 페르낭드 올리비에, 에바 구엘, 올가, 마리 테레즈 발터, 도라 마르, 프랑수아즈 질로, 자클린느 로크 등 모두 일곱 명의 여성과 사랑을 나눴는데, 그때마다 화풍이 바뀌었다. 어디 그뿐이랴. 루 살로메를 사랑했던 니체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비롯하여 쇼팽과 조르주 상드, 보들레르와 잔느 뒤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황진이와 서화담 등 출중한 예술가들이 벌인 세기적 사랑은 그들이 나눴던 사랑의 내용이 행복했건 불행했건 간에 유명세로 인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은 사랑이란 벌의 침에 일단 쏘이면 그 묘약에 취해 정신을 잃는다. 이 때 몸에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는데,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란 성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이 바로 그 것. 그래서 헬렌 피셔 교수는 사랑을 일러 다름 아닌 ‘화학적 반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화학적 작용이건 정신적 작용이건 ‘몸’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서 몸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시경의 국풍(國風) 편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워도 얻지 못해/자나 깨나 생각/아, 끝없는 시름이여/잠 못 이루고 뒤척이네(求之不得/寤寐思服/悠哉悠哉/輾轉反側).”
여기서 맨 끝에 나오는 ‘전전반측’이란 말은 긴긴 밤에 그리움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는 동작을 나타낸다. 낮에 나물캐는 처녀를 밭에서 본 총각이 눈에 어른거리는 처녀의 모습을 못 잊어 밤을 하얗게 밝히는 형국이다.
홍지윤의 ‘인생은 아름다워’ 연작을 보면서 문득 시경의 이 구절이 떠올랐던 것은 웬일일까. 그녀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의도를 “시를 지어 그림으로 그리고 기록으로 남긴다. 꿈결 같은 인생, 인생은 아름답다”라고 썼다. 말하자면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는 방법을 통해 내면에 일렁이는 온갖 상념과 감정을 하나의 화면에 풀어내자는 것. 그림에 문자를 집어넣는 수법은 서양의 경우 1910년을 전후하여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오랜 관행이었다. 이른바 그림의 여백에 화제(畵題)를 써넣는 ‘시서화(詩書畵)’ 일체의 사상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홍지윤의 ‘퓨전 동양화’ 혹은 ‘시그림’은 서양보다는 동양의 오랜 회화 전통에 기대고 있는 것이 분명할 터. 아무튼 그녀가 그림 속에 써넣은 시구를 인용해 보자. 먼저 ‘꿈결같은 인생’이다.
“노래하는 푸른 하늘/노래하는 강 물결/노래하는 분홍 꽃잎/노래하는 마지막 잎새//흥에 겨운 한 때/꿈결같은 인생.”
홍지윤은 화려한 꽃과 새, 벗은 여인의 몸을 화면 가득히 그리는 한편, 그 사이사이에 시를 써넣는다. 배경은 흰 것도 있지만 먹으로 검게 칠한 것이 더 많다. 한글과 한문, 그리고 때로는 영어로 쓴 문구들은 그림에 담긴 사물들 사이에 마치 숨바꼭질하듯이 숨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그림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홍지윤은 시를 씀과 동시에 그림을 그린다. 거기, 그림의 한 복판에 벌거벗은 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와 벚꽃에 파묻혀 있는 그녀의 몸을 이파리가 주렁주렁 달린 넝쿨이 휘감아 흐른다. 이 그림에 녹아있는 관능미는 과연 어디서 오는가. 춤을 추는 모습을 뒤에서 포착한 이 그림에서는 양옆에서 몸을 파묻듯이 감싸고 있는 화려한 꽃들로 인해 더욱 관능미가 느껴진다.
게다가 잘 익은 복숭아에서 풍기는 듯한 달콤한 죽음의 냄새.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죽음보다는 오히려 활짝 핀 꽃의 이울음이 주는 연상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아니면 화면을 가득 뒤덮고 있는 검정색에서 오는 것일까. 다시 그녀가 쓴 시 ‘그녀, 아름다운 꽃’을 보자.
“고운 흙 위에서 작은 그녀가 잠깐 낮잠을 자고 있었다/지나가던 바람 한 자락이 바다를 구경하러 가려다/그 고운 자태에 눈이 멀어 그만 그녀를 깨워 춤을 추기 시작했다/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그녀를 소모하기 시작했다.”
고대 희랍에서는 시와 그림을 서로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는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란 유명한 발언을 통해 멀리서 봐야 할 그림과 가까이서 봐야 할 그림이 있는 것처럼 시의 해석도 서로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원리가 전복되는 것은 ‘그림이 시를 모방하고(그림은 시와 같이:ut poesis pictura)’, ‘시는 그림을 본받도록 했던(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 근대의 예술원리가 태동하면서부터다.
홍지윤은 ‘인생은 아름다워’ 연작을 통해 시와 그림의 통교(通交)내지는 혼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미지뿐인 회화의 관례에 저항한다. 그녀는 시를 읽으며 그림을 보는 듯 하게 만들고, 그림을 보면서 시를 연상케 하는 형식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거기서 인간의 몸은 사랑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마치 사랑하면서 소모되듯이.
/yoonjs0537@hanmail.net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문화탐험] <14> 홍지윤-시는 그림과 같이,그림은 시와 같이
2008-07-31 16:52:00
■인간의 몸은 사랑의 주체이자 객체
시와 그림의 통교를 시도 ... 회화의 관례에 저항
'인생은 아름다워'연작 유명 '붓질하는 음유 시인
이제까지 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오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랑을 빼먹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 소설가, 철학자, 화가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마르지 않는 샘처럼 사랑은 아직도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사랑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군주와 신하 사이의 사랑, 스승이 제자에게 베푸는 사랑….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역시 남녀간의 사랑이다. 햄릿과 오필리어 사이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 때문에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고 만 불행한 사랑의 표본이다.
그러나 사랑이 죽음을 불러오는 것만은 아니다. 예술가에게 있어 사랑은 영감의 원천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파블로 피카소. 그는 생전에 페르낭드 올리비에, 에바 구엘, 올가, 마리 테레즈 발터, 도라 마르, 프랑수아즈 질로, 자클린느 로크 등 모두 일곱 명의 여성과 사랑을 나눴는데, 그때마다 화풍이 바뀌었다. 어디 그뿐이랴. 루 살로메를 사랑했던 니체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비롯하여 쇼팽과 조르주 상드, 보들레르와 잔느 뒤발,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황진이와 서화담 등 출중한 예술가들이 벌인 세기적 사랑은 그들이 나눴던 사랑의 내용이 행복했건 불행했건 간에 유명세로 인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은 사랑이란 벌의 침에 일단 쏘이면 그 묘약에 취해 정신을 잃는다. 이 때 몸에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는데,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란 성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이 바로 그 것. 그래서 헬렌 피셔 교수는 사랑을 일러 다름 아닌 ‘화학적 반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화학적 작용이건 정신적 작용이건 ‘몸’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서 몸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시경의 국풍(國風) 편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워도 얻지 못해/자나 깨나 생각/아, 끝없는 시름이여/잠 못 이루고 뒤척이네(求之不得/寤寐思服/悠哉悠哉/輾轉反側).”
여기서 맨 끝에 나오는 ‘전전반측’이란 말은 긴긴 밤에 그리움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는 동작을 나타낸다. 낮에 나물캐는 처녀를 밭에서 본 총각이 눈에 어른거리는 처녀의 모습을 못 잊어 밤을 하얗게 밝히는 형국이다.
홍지윤의 ‘인생은 아름다워’ 연작을 보면서 문득 시경의 이 구절이 떠올랐던 것은 웬일일까. 그녀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의도를 “시를 지어 그림으로 그리고 기록으로 남긴다. 꿈결 같은 인생, 인생은 아름답다”라고 썼다. 말하자면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는 방법을 통해 내면에 일렁이는 온갖 상념과 감정을 하나의 화면에 풀어내자는 것. 그림에 문자를 집어넣는 수법은 서양의 경우 1910년을 전후하여 피카소와 브라크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오랜 관행이었다. 이른바 그림의 여백에 화제(畵題)를 써넣는 ‘시서화(詩書畵)’ 일체의 사상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홍지윤의 ‘퓨전 동양화’ 혹은 ‘시그림’은 서양보다는 동양의 오랜 회화 전통에 기대고 있는 것이 분명할 터. 아무튼 그녀가 그림 속에 써넣은 시구를 인용해 보자. 먼저 ‘꿈결같은 인생’이다.
“노래하는 푸른 하늘/노래하는 강 물결/노래하는 분홍 꽃잎/노래하는 마지막 잎새//흥에 겨운 한 때/꿈결같은 인생.”
홍지윤은 화려한 꽃과 새, 벗은 여인의 몸을 화면 가득히 그리는 한편, 그 사이사이에 시를 써넣는다. 배경은 흰 것도 있지만 먹으로 검게 칠한 것이 더 많다. 한글과 한문, 그리고 때로는 영어로 쓴 문구들은 그림에 담긴 사물들 사이에 마치 숨바꼭질하듯이 숨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그림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홍지윤은 시를 씀과 동시에 그림을 그린다. 거기, 그림의 한 복판에 벌거벗은 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와 벚꽃에 파묻혀 있는 그녀의 몸을 이파리가 주렁주렁 달린 넝쿨이 휘감아 흐른다. 이 그림에 녹아있는 관능미는 과연 어디서 오는가. 춤을 추는 모습을 뒤에서 포착한 이 그림에서는 양옆에서 몸을 파묻듯이 감싸고 있는 화려한 꽃들로 인해 더욱 관능미가 느껴진다.
게다가 잘 익은 복숭아에서 풍기는 듯한 달콤한 죽음의 냄새.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죽음보다는 오히려 활짝 핀 꽃의 이울음이 주는 연상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아니면 화면을 가득 뒤덮고 있는 검정색에서 오는 것일까. 다시 그녀가 쓴 시 ‘그녀, 아름다운 꽃’을 보자.
“고운 흙 위에서 작은 그녀가 잠깐 낮잠을 자고 있었다/지나가던 바람 한 자락이 바다를 구경하러 가려다/그 고운 자태에 눈이 멀어 그만 그녀를 깨워 춤을 추기 시작했다/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했다/그녀를 소모하기 시작했다.”
고대 희랍에서는 시와 그림을 서로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는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란 유명한 발언을 통해 멀리서 봐야 할 그림과 가까이서 봐야 할 그림이 있는 것처럼 시의 해석도 서로 다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원리가 전복되는 것은 ‘그림이 시를 모방하고(그림은 시와 같이:ut poesis pictura)’, ‘시는 그림을 본받도록 했던(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 근대의 예술원리가 태동하면서부터다.
홍지윤은 ‘인생은 아름다워’ 연작을 통해 시와 그림의 통교(通交)내지는 혼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미지뿐인 회화의 관례에 저항한다. 그녀는 시를 읽으며 그림을 보는 듯 하게 만들고, 그림을 보면서 시를 연상케 하는 형식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거기서 인간의 몸은 사랑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마치 사랑하면서 소모되듯이.
/yoonjs053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