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01 컬쳐뉴스
작성자
hongjiyoon
작성일
2015-02-25 05:05
조회
581
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3&title_down_code=002&area_code_num=100&article_num=7857
리뷰&칼럼
풍경의 뒤꼍
[전시리뷰] 홍지윤 《음유 낭만 환상-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2007-06-01 오후 12:33:13
[정형탁 _ 전시출판기획자]
▲ 홍지윤의 시서화(詩書畵) 전시는 청파동 작업실에서 겪은 작가의 내밀한 심상과 주변 풍경의 뒤꼍을 보여준다.
갑자기 봄날이 온 것 같았던 따스하던 며칠 전에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아름다운 철쭉이 이천 원이요, 이천 원이요”하던 꽃장수 아저씨에게 뛰듯이 달려 나가 사온 푸르기만 하던 철쭉 화분 두 개에 오늘 분홍 꽃이 활짝 피었다. 정말 환상적이다.-2007년 3월 25일 청파동에서 홍지윤
두 입술이 열리면서 몸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싱싱한 ‘파’음이 몸 밖으로 배출되는 듯한 느낌을 지닌 푸른 단어, 청파동(靑波洞). 홍지윤의 이번 전시 《음유 낭만 환상-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5월 2일-15일,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선보인 시서화(詩書畵) 전시는 청파동 작업실에서 겪은 작가의 내밀한 심상과 주변 풍경의 뒤꼍을 보여준다. 내가 이번 전시 리뷰로 이 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90년대 이후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서사가 주를 이룬 미술판에서 감각적인 서정을 이토록 형식적으로 잘 표현하는 작가를 못 봐서다.
no more blues
개인전으로 13번째인 이번 전시에서 홍지윤이 보여 준 작품의 내용과 형식은 가히 다채롭다고 할 만하다. 풍경을 사색의 깊이와 울림으로 거른 감성은 화면 가득 시적 텍스트로, 때로는 커다란 꽃잎파리로, 감성이 이입된 새로, 나무로 화면을 채운다. 화면 전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자유로운 먹의 운용은 붓이라는 부드러운 매체를 통해 종이 위를 사뿐사뿐 날아다니면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화면을 구축한다. 영상과 형광안료, 라이트박스와 디아섹 등 작품을 담아내는 형식에 있어서도 동양화라는 범주로 가두기가 무색하리만치 다양하다.
형식과 내용의 이러한 변주에서 가장 눈에 두드러진 특징은 화면전체에 배치된 시어(詩語)다. 그는 일상에서 건진 모든 현상의 이미지들을 1차적으로 시로 표출한다. 가령 작년 독일 뮌헨에서 느낀 풍경에서 얻은 이미저리는 노란 이파리가 화면 가득 채워진 <서쪽 하늘 들국화>로 태어나고, 우연히 들은 브라질 전통음악 <슬픔이여 떠나라(no more blues)>는 가사 가 배경이 되고 그 배경을 무대로 기타를 든 작가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시가 풍경이나 산수를 완성하는 마지막 장식구였다면 홍지윤의 시는 텍스트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고 형태로서 기능한다. 루빈의 술잔처럼 배경과 형태가 뒤바뀌어 이미지로서 텍스트는 운율을 만들고 화면에 적절히 배치되어 훌륭한 조형적 요소가 된다.
세상은 모든 게 침이고 독이다
주위의 모든 존재와 현상, 작가 자신과 교접하는 모든 일상을 비틀지 않고 고스란히 화폭에 착지시키는 방법에 있어서, 홍지윤의 작품은 사변이나 관념을 초월한다. 그의 작품은 오히려 진실에의 착지(着紙)에 가깝다. 느낌을 수월하게 시각화시킬 줄 아는 역량에서 그는 느낌을 가지고 논다고 해야 할 것이다. 느낌을 구조화하고 해체하고 논다는 것은 현상의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자신에로의 환원적 시각을 세상에 되돌리는 방식에서 홍지윤의 느낌의 이미지는 리얼리스틱하기도 하다.
“내게 세상은 모든 게 침이고 독”이라는 말처럼 작가는 세상의 모든 날이미지를 소재로 삼는다.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청각, 촉각, 공감각적 촉수를 가진 작가에게 세상은 쭈볏쭈볏한 예각으로 선 이미지일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주위 사람의 배신, 풍경의 심상찮음을 작가는 객관화시킬 줄 안다. 천상 홍지윤은 아티스트인 것이다.
따스한 시선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홍지윤의 감수성은 일상과 감각의 리얼리티를 찾기 어려운 요즘 미술계에서 오히려 실팍하다. 내면의 풍경화라는 안채가 있다면 작가는 그 안채의 뒤꼍과 앞마당을 자유롭게 노다닌다. 화면의 울림은 그 놀이 속에서 얻는 또하나의 혜택이겠다.
리뷰&칼럼
풍경의 뒤꼍
[전시리뷰] 홍지윤 《음유 낭만 환상-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2007-06-01 오후 12:33:13
[정형탁 _ 전시출판기획자]
▲ 홍지윤의 시서화(詩書畵) 전시는 청파동 작업실에서 겪은 작가의 내밀한 심상과 주변 풍경의 뒤꼍을 보여준다.
갑자기 봄날이 온 것 같았던 따스하던 며칠 전에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아름다운 철쭉이 이천 원이요, 이천 원이요”하던 꽃장수 아저씨에게 뛰듯이 달려 나가 사온 푸르기만 하던 철쭉 화분 두 개에 오늘 분홍 꽃이 활짝 피었다. 정말 환상적이다.-2007년 3월 25일 청파동에서 홍지윤
두 입술이 열리면서 몸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싱싱한 ‘파’음이 몸 밖으로 배출되는 듯한 느낌을 지닌 푸른 단어, 청파동(靑波洞). 홍지윤의 이번 전시 《음유 낭만 환상-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5월 2일-15일,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선보인 시서화(詩書畵) 전시는 청파동 작업실에서 겪은 작가의 내밀한 심상과 주변 풍경의 뒤꼍을 보여준다. 내가 이번 전시 리뷰로 이 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90년대 이후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서사가 주를 이룬 미술판에서 감각적인 서정을 이토록 형식적으로 잘 표현하는 작가를 못 봐서다.
no more blues
개인전으로 13번째인 이번 전시에서 홍지윤이 보여 준 작품의 내용과 형식은 가히 다채롭다고 할 만하다. 풍경을 사색의 깊이와 울림으로 거른 감성은 화면 가득 시적 텍스트로, 때로는 커다란 꽃잎파리로, 감성이 이입된 새로, 나무로 화면을 채운다. 화면 전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자유로운 먹의 운용은 붓이라는 부드러운 매체를 통해 종이 위를 사뿐사뿐 날아다니면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화면을 구축한다. 영상과 형광안료, 라이트박스와 디아섹 등 작품을 담아내는 형식에 있어서도 동양화라는 범주로 가두기가 무색하리만치 다양하다.
형식과 내용의 이러한 변주에서 가장 눈에 두드러진 특징은 화면전체에 배치된 시어(詩語)다. 그는 일상에서 건진 모든 현상의 이미지들을 1차적으로 시로 표출한다. 가령 작년 독일 뮌헨에서 느낀 풍경에서 얻은 이미저리는 노란 이파리가 화면 가득 채워진 <서쪽 하늘 들국화>로 태어나고, 우연히 들은 브라질 전통음악 <슬픔이여 떠나라(no more blues)>는 가사 가 배경이 되고 그 배경을 무대로 기타를 든 작가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시가 풍경이나 산수를 완성하는 마지막 장식구였다면 홍지윤의 시는 텍스트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고 형태로서 기능한다. 루빈의 술잔처럼 배경과 형태가 뒤바뀌어 이미지로서 텍스트는 운율을 만들고 화면에 적절히 배치되어 훌륭한 조형적 요소가 된다.
세상은 모든 게 침이고 독이다
주위의 모든 존재와 현상, 작가 자신과 교접하는 모든 일상을 비틀지 않고 고스란히 화폭에 착지시키는 방법에 있어서, 홍지윤의 작품은 사변이나 관념을 초월한다. 그의 작품은 오히려 진실에의 착지(着紙)에 가깝다. 느낌을 수월하게 시각화시킬 줄 아는 역량에서 그는 느낌을 가지고 논다고 해야 할 것이다. 느낌을 구조화하고 해체하고 논다는 것은 현상의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초월적이다. 자신에로의 환원적 시각을 세상에 되돌리는 방식에서 홍지윤의 느낌의 이미지는 리얼리스틱하기도 하다.
“내게 세상은 모든 게 침이고 독”이라는 말처럼 작가는 세상의 모든 날이미지를 소재로 삼는다.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청각, 촉각, 공감각적 촉수를 가진 작가에게 세상은 쭈볏쭈볏한 예각으로 선 이미지일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주위 사람의 배신, 풍경의 심상찮음을 작가는 객관화시킬 줄 안다. 천상 홍지윤은 아티스트인 것이다.
따스한 시선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홍지윤의 감수성은 일상과 감각의 리얼리티를 찾기 어려운 요즘 미술계에서 오히려 실팍하다. 내면의 풍경화라는 안채가 있다면 작가는 그 안채의 뒤꼍과 앞마당을 자유롭게 노다닌다. 화면의 울림은 그 놀이 속에서 얻는 또하나의 혜택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