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작품에 나타난 시공간의 의미
작성자
hongjiyoon
작성일
2015-02-25 04:52
조회
1246
본인작품에 나타난 시공간의 의미
1. 들어가는 글
2. 본론
1) 작품의 개요
2) 작품의 구현 :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과 매체의 사용
3) 작품의 의미 :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
3. 결론
1. 들어가는 글
본인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동양적 사고의 체계에는 시공간적 개념이 개입된다.
본인은 이러한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이 개입된 사고체계를 일상의 詩적 체험을 통해 紙筆墨과 형광안료를 사용하여 그림과 글씨로 기록하고 디지털화하여 회화, 그래픽, 라이트 박스, 영상 등의 다양한 매체로 구현한다. 이러한 경향은 시와 수묵그림으로 엮은 2003년 출간 한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의 제목에서부터 2005년 개인전 "사계(四季)" (아트포럼뉴게이트, 서울), 2006년 독일전 "친구 넷, 동양에서 독일로“ (뮌헨문화부 초청, Munich city hall gallery 독일), 2007년 개인전 “음유 낭만 환상” (문화일보갤러리,서울), 최근 2008년 개인전 “인생은 아름다워”의 개인전 제목에서 확인된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본인작품의 개요를 간단히 소개하고 작품의 구현에 있어서
시공간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본인의 사고 체계가 어떠한 형식으로 매체로 구현되어지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2005년 개인전 "사계(四季)" 와 2007년 개인전 “음유, 낭만, 환상”의 작업노트, 2008년 개인전 “인생은 아름다워”의 전시서문의 일부 발췌를 통해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본인의 사고 체계의 흐름를 알아보고 이것이 어떠한 형식과 매체로 구현되어지는지 미디어 아트 채널 엘리스 온 (www.Aliceon.net / 홍지윤, 새로운 동양화 존재방식을 제안한다_interview 2008.05.14 Aliceon0804 interview q&a sheet _ 홍지윤)과의 인터뷰 글을 발췌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상의 에피소드가 담긴 한 편의 詩를 적고, 시에 나타난 詩語의 분석을 통해서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으로서의 본인 작품의 의미에 대해 서술하여 본인에게 있어서의 다중적인 시공간의 의미와 그것이 표현되어 나타나는 본인의 다원주의적인 작품의 의미를 추론 해 보는 것으로 연구의 결말을 삼고자 한다.
2.본론
1) 작품의 개요
‘퓨전동양화’가 키워드인 본인 작업의 특징은 동양화의 근간을 이루는 詩, 書, 畵의
개념과 書畵一體의 개념을 지필묵과 형광안료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본인작업의 분명한 특성을 이루는 동서고금의 문화와 예술, 일상적 삶에 대한 시적 체험에서 비롯된 일상의 습관적인 詩作은 그림과 글씨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긴장감이 개입된 충돌과 화해가 존재하며 ‘상충의 미학’을 기반으로 하며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양화를 연구하는 본인의 작업에 개입된 삶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은 기본적으로
동양적 사유체계에 기점을 두며 이제 더 이상 동서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다원화된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 동서양의 혼합된 사고체계 안에 자리한다.
이것으로 본인의 동양화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갖는다.
1.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된다.
나의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이다.
2. 동양에서 말하는 '변화(變化)'란 서양의 '변화(change)'와는 다르다. 변(變)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한다면 화(化)에는 근원의 변화 또는 아이덴티티의 변화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근원적 변화로 아이덴티티를 창츨하는 행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가능성을 몸에 익히면서도 그것이 아닌 아이덴티티의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는 유기적 생성 그리고 고법古法에 구애됨 없이 자기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는
개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石濤 畵論>에서는 이와 함께 고 古 /경 經/권 權의 개념을 화'化'와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는데 '경'과 '권'이란 곧 영원한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 예술 행위에 있어서 결여될 수 없는 두 개의 축,즉 원칙과 상황의 적절한 넘나듦에 대한 의미로 경과 권에 대한 논리는 법'法'과 화'化'의 의미로 대체된다.
3.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따뜻한 만남: 시(詩)+수묵(水墨)+영상 "
나의 그림에는 화려한 슬픔과 철학적 낭만이 있다. 나의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된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한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4.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홍지윤의 사유(思惟) – 움직이는 水墨그림과 詩
동양화는 시(詩)이다.
본인작업에 있어서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작업은 자연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생각으로 詩를 짓고 글씨를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것이 水墨그림이 되고 때로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현대성,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되어 수묵영상이 된다.
이는 紙, 筆, 墨과 詩, 書, 畫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으로 전개된다.
수묵은 물과 먹에 의한 단순함과 자유로움, 자연스러운 다양함을 특징이며 정신이다. “홍지윤의 사유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라는 작업의 명제는 여기서 비롯되어 이를 담아내고자 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양화의 전통과 수묵화의 기법 그리고 형광안료를 사용하는 등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와 현대의 정서와의 만남을 통해
회화, 그래픽이미지, 영상, 설치 등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젊고 생기발랄하게 해석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동양화가 동양화의 전통과 현대 산업사회의 다양한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 방식을 제안하여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한다.
2) 작품의 구현 :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과 매체의 시용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
1.작업노트
2005 홍지윤의 思惟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
사계“四季”
....네 가지 계절에 대한 사유에는 화려한 슬픔과 철학적 낭만이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대한 일상의 감흥을 표현한 “사계(四季)”는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됩니다.
봄은 만물이 피어나는“화려(華麗)”로, 여름은 모든 감각기관이 열려져 만개한 상태 그대로의 “열정(熱情)”으로, 그리고 가을은 사라지기 직전의 것들에 대한 “우수(憂愁)”로, 겨울은 잠들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고독(孤獨)”으로 나타납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 -계절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네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니다....
2. 전시서문
2007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음유, 낭만, 환상 - 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성윤진, 문화일보갤러리 큐레이터 2007 서문발췌
.............<환상은 어디에>
작가는 환상을 시공간과 대유하며 순차적 정의를 내린다.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 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 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 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 vision)이든.
(홍지윤, 작업노트 중에서, 2007)
이번 전시의 모태가 된 ‘환상’의 인상은 익숙한 일상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감정들을 구체화 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터무니없지만, 즐거운 상상의 나래는 작가적 상상으로 발전하여 앞서 언급한 다양한 매체와 내용으로 작품에 발현된다. 따뜻한 홍차를 약속한 그녀의 초대(홍지윤의 詩, <초대> 中)를 따라 원효로와 청파동의 골목인상을 반갑게 맞이할 일이다.
서양인에게도 낮선
동양인에게도 낮선
그 간극에서.
초대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날
오후 3시 즈음에 이리로 오세요.
뿌연 겨울 해가 따뜻하고요.
그 해가 보이는 창가에는 조용한 새들이 가끔 날아가요.
그리고
바흐의 아리오조를 첼로독주로 들으면요
그 어떤 여행지보다
그 어떤 천국보다
더 천국 같거든요.
바닥엔 너무 깨끗하지 않게 먼지 몇 개 찬찬히 얹혀 져 있고요.
새로 단 표백하지 않은 베이지 빛 광목 커튼이
찬 겨울바람도 막아준답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가
좀 겨를이 나면
따뜻한 홍차도 끓여 드릴께요.
당신이 꼭 이 곳에 왔으면 좋겠어요.
3.
2008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인생은 아름다워: 꿈결같은 인생:인생은 아름다워
김최은영, 더 갤러리 큐레이터 2008 서문발췌
............홍지윤, 삶과 사랑을 소요하다.
전통의 방법을 막연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이기에 고수하고 있는 먹과 종이. 그런 그를 두고 화선지 위에 먹과 붓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넣었으니 굳이 옛문헌이나 기록에 의존한다면 현대판 문인화라고 끼워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먹으로 그린 후 미디어와 라이트박스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퓨전 동양화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렇게만 단정지어 부르고 싶지는 않다.
시를 짓고, 그림으로 노래하는 홍지윤은 문인보단 이 시대의 예술쟁이로, 퓨전 동양화보단 포스트 동양화로 더 질펀하고 더 폭넓게 제대로 놀아주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장자의 우화에서 나온 이야기 소요유消遙遊와 같다. 장자가 말한 유희는 단순한 의미를 너머 그 속에서 드러나는 자유스런 마음을 승화시켜 얻어지는 정신의 해방을 뜻한다. 이런 유희는 자발적이며 신명나는 유희이다. 내가 홍지윤의 그림을 보며 '한 판 논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니 어쩌면 홍지윤은 이미 삶과 사랑을 치열함을 넘어서 소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매체의 사용
Aliceon :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3월에 진행되었던 11회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홍지윤 작가는 ‘퓨전 동양화’ 작가로 알려져 왔습니다. 본인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 ‘퓨전 동양화’에 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추구하는 퓨전동양화는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화와 디지털의 만남을 기점으로 하여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제 작업은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하며 이는 동시대 미술을 이야기 합니다. 제 스스로의 작업이 지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하게 다가가서 함께 나누고 서로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Aliceon : (위 질문에 이어서) 개인 홈페이지에서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한다”라고 언급을 하셨는데, 동양화의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서의 영상 매체와의 결합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죠.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됩니다. 제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입니다. 동양화의 수묵과 영상과의 만남은 이러한 수묵 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결합이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제 작업은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Aliceon :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시다 보면, 기존 동양화 작업들과 다른 새로운 고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들인가요?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지필묵을 재료로 한다는 양식적 특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문인화의 개념에는 문학에서 말해져온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을 그린다는
상외지상(象外之象, 형상 밖의 표상 - 언제나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허의 상은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드러나게 된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켜 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부하며 생동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외지상(上外之象)이라고 하였다) 이라는 말에 의미를 둡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동양화가 단지 재료로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게는 정신성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이러한 동양화의 특성이 강한 제 작품을 가지고 기술적 변형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매체로써 동양화(지필묵)과 사진, 그래픽, 영상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써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둘의 성격을 한 선상위에서 이해하고 비교, 검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적이미지와 시각이미지, 무거움과 가벼움, 비움과 욕심, 수렴과 발산, 느림과 빠름,
종적사고와 횡적 사고, 모호함과 정확함,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이제는 제게 있어서 삶을 유추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문제들은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 믿음위에서 해결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민들이 단지작업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Aliceon : 예전 한 매체(2008 아트프라이스 1월호 - Artist Forum)와의 인터뷰에서 ‘작품과 작가의 삶이 일치하는가?’ 라는 질문에, ‘삶과 일치 한다. 삶을 詩로 적고 그것을 작품화 하는 것이 내 작업의 내용이기 때문이다’라고 답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삶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영상 매체가 지닌 특성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가요?
저는 오래전부터 그날의 삶을 하루하루 짧은 일기나 혹은 단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감성을 통해 정리되거나 혹은 그대로 풀어져서 한편, 한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어들을 정리하고 바라보면서 시가 가지게 되는 자체의 운율과 글씨자체가 가지고 있는 조형성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글과 글씨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았다가 늘어놓았다가 하며 또 다른 형태를 상상합니다. 이것들은 다시 이미지가 되어 편집프로그램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빠뜨릴 수 없는데 이는 또한 동양화의 지필묵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양한 농담을 담은 먹물은 단지 눈으로 보기에는 검은 먹물로만 보입니다. 이것이 시간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후 각기 다른 농담으로 화선지위에서 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시간을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 원래의 색을 보여주는 수묵의 특성은 삶의 과정과 닮아있다고 여겨졌고 특별히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묵그림이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서 편집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도 한 맥락위에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묵작업의 과정과 삶의 과정의 문제 그리고 수묵작업을 컴퓨터를 통해 매체화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존재하는 시간성은 최근 이야기 하고 있는 제 감수성에 대한 ’기록‘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기도 합니다.
감성을 시간성위에서 시각화 하는 데에 있어서 영상매체는 제게 있어서 수묵작업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웠고 작업의 경쾌한 진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작업의 특징을 말 할 때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제 작업에 있어서 영상 매체가 갖는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Aliceon : 홍지윤 작가의 작업을 보면, 한편의 영상 편지를 보는 듯 합니다. 일전의 언급을 보면, '나에게 움직이는 수묵그림-수묵영상은 시간의 흐름을 동양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하셨는데,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란 어떠한 의미인가요?
위의 답변과 연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저는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 또는 세월이지나면서 변화되어가는 사람들의 겉모습과 속마음, 그것들과 나와의 관계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어쩌면 제 작업이 이러한 부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성이 재빠르지 않고 단번에 무엇을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제 심성은 심사숙고하게 느린 속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수묵화의 재료적 특성과 닮아있습니다. 이제는 원래의 내가 그런 것이었는지 동양화를 그려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겠지만요.
2003년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본격적으로 수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1997경쯤부터 써온 편지나 일기 시 들을 엮어서 간간히 그려온 수묵드로잉들과 함께 엮어 만든 책입니다. 책의 제목을 지을 무렵 고심 끝에 책의 내용에 들어있는 시의 제목들을 죽 늘어놓고 보니 결국 지나가는 시간위에서 일어났던 또는 겪었던 감정들을 적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책을 출간한 이후 그러한 면에서의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고 본격적으로 수묵그림들과 시들을 영상에 담아보기로 하고 작업한 수묵영상 ‘가을날 저녁에’(2003)이 지금까지 수묵영상작업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수묵의 특성과 그것을 닮은 제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빨리 움직이는 세태나 여타의 영상작업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성을 가진 영상작업의 디테일에 있어서 느린 디졸브로 이어지는 편집방식에서 느림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느림 안에서 발생되는 빠르기와 또 다른 느림에 대한 생각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림’으로 대체되는 동양적 사고와 동양화 내 삶의 방법을 수묵영상작업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 라고 표현 해 본 것입니다.
Aliceon : 2005년작 <사계>와 같은 작품을 보면, 작가의 삶을 통해 느껴지는 감성이 ‘영상, 그래픽, 사진, 수묵화’ 등의 다양한 표현 방법과 압축된 ‘시(詩)’로 드러나는 듯 합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문인화에서 보여졌던 ‘시(詩) ․ 서(書) ․ 화(畵)’를 영상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에 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됩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동양화는 시(詩)입니다. 나의 작업은 詩를 짓고 그 시를 글씨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러한 시와 글씨가 水墨그림이 되고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영상이 되는 것이죠.
Aliceon :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시다 보면, 기존 동양화 작업들과 다른 새로운 고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들인가요?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지필묵을 재료로 한다는 양식적 특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문인화의 개념에는 문학에서 말해져온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을 그린다는
상외지상(象外之象, 형상 밖의 표상 - 언제나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허의 상은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드러나게 된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켜 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부하며 생동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외지상(上外之象)이라고 하였다) 이라는 말에 의미를 둡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동양화가 단지 재료로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게는 정신성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이러한 동양화의 특성이 강한 제 작품을 가지고 기술적 변형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매체로써 동양화(지필묵)과 사진, 그래픽, 영상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써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둘의 성격을 한 선상위에서 이해하고 비교, 검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적이미지와 시각이미지, 무거움과 가벼움, 비움과 욕심, 수렴과 발산, 느림과 빠름,
종적사고와 횡적 사고, 모호함과 정확함,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이제는 제게 있어서 삶을 유추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문제들은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 믿음위에서 해결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민들이 단지작업을 위한 것뿐만
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3) 작품의 의미 :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
본 장에서는 본인의 시공간적 사고체계가 압축되어 나타난 일상의 에피소드를
한 편의 詩로 적는다. 이는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이 개입된 본인의 사고체계와 본인의 작업과정과 방법에 대한 상징이자 은유이다. 또한 이는 총체적으로 볼 때,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칸트의 초월철학적 시공간의 개념을 지지하는 본인의 삶의 과정과 방법에
대한 논의이다. 먼저 은유적인 내면을 형상화환 각 詩語의 분석하여 각 시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한 후,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과 초월철학적 시공간의 개념이 다층구조를 이루는 본인의 작품을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으로 설정하여 작품의 의미 논해보고자 한다.
Episode
늦은 오늘도 아니고 이른 내일도 아닌 어두운 밤,
한 여름도 아닌데 그칠 것 같지 않은 소나기가 온다.
잠깐의 망설임, 낯선 문 앞, 뛰어 나간다.
그런 거다.
시간과 공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가슴이 움직일 수 있다면,
우산 없이도 퍼붓는 빗속을 뛰어 나갈 수 있다면.
Reply
‘늦은 오늘도 아니고 이른 내일도 아닌 어두운 밤’
먼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작업 또는 삶의 시공간 안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 해 보기로 한다.
‘한 여름도 아닌데 그칠 것 같지 않은 소나기가 온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작업 또는 삶의 시공간이 아닌 예측을 불허한 시공간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또한 외부로터 내면으로 두드림이 시작되고 또한 작업의 종결을 위한 시작이 이루어진다.
‘잠깐의 망설임, 낯선 문 앞,’
언젠가 집으로 떠나야 한다는 결정상황의 전재위에서 그리고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결정상황의 전재위에서 시점과 시점을 이루는 공간은 불가분 한 몸이다.
‘잠깐’은 고유한 자신만의 본성과 뇌구조와 생활방식의 속성에 기반을 둔 개인적인 시간의 척도이자 정도의 문제이며 이것과 저것 또는 그 어떤 것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함과 산재함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에 대한 유보와 선택에 대한 속성의 문제를 말한다.
‘잠깐’에 대한 시간적 속성에는 얼마나 많은 느리거나 빠름의 시간적 불확실성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망설임’이 말하는 심리적 불확실성 안에는 또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지금, 1분 후, 5분 후, 한 시간 후, 아니면 .... ? 그리고 또한 ‘낯선 문 앞’ 이 말하는 낯선 공간의 속성에는 또 얼마나 다양한 낯설음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모호함과 산재함의 지점에서 본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상충과 충돌 그리고 화해의 범람이 이루어진다.
‘뛰어 나간다.’
다양한 가능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추하고 검증을 거친 후 내가 정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고와 이것이 이루어내는 방법으로 내면의 실체는 표출된다. 즉 작품화되어진다.
‘시간과 공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속성에는 이 둘에 의해 살아가고 행동하는 일종의 규율로써 객관적인
내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함의가 있다. 그러나 내가 개입되기 시작한 과정을 통해서
이미 시공간은 나의 시공간이 되었고 이제 나는 내가 주체가 되어 나로부터 기인하는 시간과 공간을 운용하게 된다. 이는 철저히 동양적 사고체계에서 기인하며 실제로 본인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은 현실, 즉 시공간의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본인의 작업에서 또는 삶의 방식에서 시공간이란 존재하지만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과도 같다.
이는 2007년 개인전 <음유, 낭만, 환상>과 연결고리를 갖는다.
이러한 본인의 작업경향을 최근전시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인생은 아름다워: 꿈결같은 인생:인생은 아름다워 2008에서 김최은영(미학)은 이렇게 말한다.
“ ............홍지윤, 삶과 사랑을 소요하다.
전통의 방법을 막연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이기에 고수하고 있는 먹과 종이. 그런 그를 두고 화선지 위에 먹과 붓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넣었으니 굳이 옛문헌이나 기록에 의존한다면 현대판 문인화라고 끼워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먹으로 그린 후 미디어와 라이트박스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퓨전 동양화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렇게만 단정지어 부르고 싶지는 않다.
시를 짓고, 그림으로 노래하는 홍지윤은 문인보단 이 시대의 예술쟁이로, 퓨전 동양화보단 포스트 동양화로 더 질펀하고 더 폭넓게 제대로 놀아주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장자의 우화에서 나온 이야기 소요유消遙遊와 같다. 장자가 말한 유희는 단순한 의미를 너머 그 속에서 드러나는 자유스런 마음을 승화시켜 얻어지는 정신의 해방을 뜻한다. 이런 유희는 자발적이며 신명나는 유희이다. 내가 홍지윤의 그림을 보며 '한 판 논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니 어쩌면 홍지윤은 이미 삶과 사랑을 치열함을 넘어서 소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본인은 이 지점에서 이성과 인식의 재료들은 모두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험론과
사물의 본성에 관한 탐구는 우리 정신의 본성에 있는 본유 관념에 대한 탐구라는 이성론을 결합한 칸트의 시공간과 지성의 범주 그리고 초월철학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칸트는 우리의 이성이 우리 밖의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감각이며
감각 재료 없이는 결코 실질적 내용을 가진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또한 감각 자료들은 잡다한 것으로 정리 정돈될 때 하나의 사물이 인식될 수 있지만 이러한 정돈의 틀은 감각 자료에 있지 않다고 한다. 이 틀은 우리 인식 능력이 스스로 마련한 선험적(a priori)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가 감성의 형식인 시간, 공간 표상이고 둘째는 지성의 형식인 순수한 지성 개념이다.
1. 공간, 시간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모든 사물들의 관계의 객관적인 질서 틀이지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에게 감지되는 사물의 실재 규정이되, 감각될 수 없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관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2. 지성의 범주를 말할 때, 시간과 공간 질서 표상에 따라 일차로 정돈된 감각재료들은
양(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질(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관계(실체-속성, 원인-결과, 상호작용), 양태(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의 표상에 따라 종합된다.
이때에야 비로소 하나의 어떤 무엇이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종합을 '사고'라 부르고 사고 작용하는 이성의 기능을 지성이라 부른다.
이는 순수 지성의 근원 개념이고 사고 형식으로 기능하다는 의미에서 범주다.
3. 시공간과 범주의 틀을 따르는 우리 의식의 인식 작용에 우리에게 인식되는 사물은
규정을 받는다. 그가 말하는 초월철학에 대하여 경험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동시에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된다. 의식의 선험적인 원리들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자 인식된 사물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의식의 이런 기능을 칸트는 초월적이라 부른다. 인간의 초월적 의식은 세계를 형성하는 물질적 재료까지를 만들어 내지는 않지만, 존재자의 보편적 존재규정이 된다고 보아 인간 이성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상 세계의 창조자라고 말한다.
‘가슴이 움직일 수 있다면,’
빗속을 뛰어나가기 전까지의 내면안에서의 검증은 이미 나로부터 기인하는 시공간을 만들었고 거기에 ‘나’라고 하는 주관적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산 없이도 퍼붓는 빗속을 뛰어 나갈 수 있다면.
이제 결정과 표출을 담당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도구나 답습체계를 의식하지 않고
본인이 정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내는 방법을 따라 내면의 실체를 표출하게 되었다. 피부에 닿는 퍼붓는 비의 감각을 느끼듯 신체적 쾌락의 산재된 의미가 개입된
직관적 감각에 의한 작업과정은 자기부정과 자기모순에 대한 긍정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검증을 통해 안주하지 않는 도발적 자아를 빌어 정해진 질서로부터 도주하여 질서를 어지럽힌다. 그리고 이질적이며 얌전하지 않은 역동적 실험의 형태로 본인 자신을 도구화한다.
이로써 본인은 작업 자체를 기존의 것에 순응하지 않는 못된 쾌락의 장으로 삼으며
또한 이로써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에 귀착하게 된다.
3. 결론
작가로써 본인의 에너지는 느림과 고요와 그리고 자유로움에서 기인하며 다양함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연유한다. 이것의 배경에는 동양적 시공간성이 자리한다. 특히 최근의 작업에 나타나는 디지털 매체와의 혼용에서 ‘동양적 시간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서 본인은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과 매체의 사용에 있어서 본인의 미디어 작업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로 정의하였다. 다음은 그것의 요약이다.
'시간성‘이라는 개념은 동양화의 지필묵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이다. 예를 들면 다양한 농담을 담은 먹물은 단지 눈으로 보기에는 검은 먹물이 시간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후 각기 다른 농담으로 화선지위에서 본 모습으로 남게 된다. 본인에게 있어서
시간이 지나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 원래의 색을 보여주는 수묵의 특성은 삶의 과정과 닮아있다고 여겨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묵그림이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서 편집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한 맥락위에서 다가왔다.
그리고 수묵작업의 과정과 삶의 과정의 문제 그리고 수묵작업을 컴퓨터를 통해 매체화
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존재하는 시간성은 최근 이야기 하고 있는 본인의 감수성에 대한 ’기록‘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게 된다. 감성을 시간성위에서 시각화 하는 데에 있어서 영상매체는 본인에게 있어서 수묵작업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웠고 작업의 경쾌한 진행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는 작업의 특징을 말 할 때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본인의 작업에 있어서 영상 매체가 갖는 특성이 된다.
본인은 계절과 세월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라 변해가는 사람들의 겉모습과 속마음, 그것들과 나와의 관계를 예민하게 느낀다. 본인의 작업은 언제부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어쩌면 이러한 부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천성이 재빠르지 않고 단번에 무엇을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본인의 심성은 심사숙고하게 느린 속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수묵화의 재료적 특성과 닮았다.
이제는 원래의 내가 그런 것이었는지 동양화를 그려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겠지만. 2003년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는 본격적으로 수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1997경쯤부터 써온 편지나 일기 시 들을 엮어서 간간히 그려온 수묵드로잉들과 함께 엮어 만든 책이다. 지나가는 시간위에서 일어났던 또는 겪었던 감정들을 적어 놓았던 책을 출간한 이후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고 본격적으로 수묵그림들과 시들을 영상에 담아보기로 하고 작업한 수묵영상 ‘가을날 저녁에’(2003)이 지금까지 수묵영상작업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다.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수묵의 특성과 그것을 닮은 본인의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빨리 움직이는 세태나 여타의 영상작업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성을 가진 영상작업의 디테일에 있어서 느린 디졸브로 이어지는 편집방식에서 느림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느끼는 느림 안에서 발생되는 빠르기와 또 다른 느림에 대한 생각들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림’으로 대체되는 동양적 사고와 동양화 그리고 내 삶의 방법을 수묵영상작업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 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여기에 상충과 충돌 그리고 화해 모호함과 산재함을 작업의 과정에 개입시킨다.
여기에서 단지 동양화와 매체와의 만남 또는 문화와 문화와의 만남을 넘어선 근본적인 개념의 <퓨전>이 연유하며 이러한 작업의 도구는 양자성이 아닌 다양성을 활보하며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다원주의적 중층구조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상충과 충돌, 모호함과 산재함 그리고 <퓨전동양화>라는 키워드로 읽혀지는
본인의 작업에는 크게 두 가지 함의가 있다. 하나는 시공을 벗어난 폭넓은 사고를 보게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동양화 작가로서의 태생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이는 부정적인 견해라고는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오늘날의 다원주의 미술에 있어서 그리고 예술의 범주 안에서 이미 서구작가의 작업이 동양적 사고의 차용을 가능하게 했듯이 해법을 달리할 뿐 작업의 주체자로서 동양인인 본인의 작업도 또한 서양적 사고의 차용을 가능하게 하는 다원주의적 추론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미술의 현상으로서 뿐만이 아니다.
다원주의 미술에서 말하는 바인 미술가의 근본적인 사고체계가 만드는 미술역할의 확산 또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하다.
추후 본인의 작업은 이제까지의 작업을 말하는 성윤진의 말대로 서양인에게도 낮선, 동양인에게도 낮선 그 간극의 연장 선상위에 있을 수도 있고, 그 간극에 존재하는
상충과 충돌, 모호함과 산재함으로부터의 수많은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본인의 사고와 모든 것이 자유로운 다원주의 미술 안에서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낙관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작가적 정체성이 명쾌하게 드러나는 자유롭고 건강한 작업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공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동서고금’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소요’라는 말이 있다. 본인의 작업은 이러한 시공간의 의미 안에서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먼저 본인을 둘러싼 시공간 안에서 자아를 배출하는 것에 작업의 목적을 두어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배설의 장소로써 시공간을 활용하고자한다.
1. 들어가는 글
2. 본론
1) 작품의 개요
2) 작품의 구현 :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과 매체의 사용
3) 작품의 의미 :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
3. 결론
1. 들어가는 글
본인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는 동양적 사고의 체계에는 시공간적 개념이 개입된다.
본인은 이러한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이 개입된 사고체계를 일상의 詩적 체험을 통해 紙筆墨과 형광안료를 사용하여 그림과 글씨로 기록하고 디지털화하여 회화, 그래픽, 라이트 박스, 영상 등의 다양한 매체로 구현한다. 이러한 경향은 시와 수묵그림으로 엮은 2003년 출간 한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의 제목에서부터 2005년 개인전 "사계(四季)" (아트포럼뉴게이트, 서울), 2006년 독일전 "친구 넷, 동양에서 독일로“ (뮌헨문화부 초청, Munich city hall gallery 독일), 2007년 개인전 “음유 낭만 환상” (문화일보갤러리,서울), 최근 2008년 개인전 “인생은 아름다워”의 개인전 제목에서 확인된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본인작품의 개요를 간단히 소개하고 작품의 구현에 있어서
시공간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본인의 사고 체계가 어떠한 형식으로 매체로 구현되어지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2005년 개인전 "사계(四季)" 와 2007년 개인전 “음유, 낭만, 환상”의 작업노트, 2008년 개인전 “인생은 아름다워”의 전시서문의 일부 발췌를 통해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본인의 사고 체계의 흐름를 알아보고 이것이 어떠한 형식과 매체로 구현되어지는지 미디어 아트 채널 엘리스 온 (www.Aliceon.net / 홍지윤, 새로운 동양화 존재방식을 제안한다_interview 2008.05.14 Aliceon0804 interview q&a sheet _ 홍지윤)과의 인터뷰 글을 발췌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상의 에피소드가 담긴 한 편의 詩를 적고, 시에 나타난 詩語의 분석을 통해서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으로서의 본인 작품의 의미에 대해 서술하여 본인에게 있어서의 다중적인 시공간의 의미와 그것이 표현되어 나타나는 본인의 다원주의적인 작품의 의미를 추론 해 보는 것으로 연구의 결말을 삼고자 한다.
2.본론
1) 작품의 개요
‘퓨전동양화’가 키워드인 본인 작업의 특징은 동양화의 근간을 이루는 詩, 書, 畵의
개념과 書畵一體의 개념을 지필묵과 형광안료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본인작업의 분명한 특성을 이루는 동서고금의 문화와 예술, 일상적 삶에 대한 시적 체험에서 비롯된 일상의 습관적인 詩作은 그림과 글씨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긴장감이 개입된 충돌과 화해가 존재하며 ‘상충의 미학’을 기반으로 하며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양화를 연구하는 본인의 작업에 개입된 삶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은 기본적으로
동양적 사유체계에 기점을 두며 이제 더 이상 동서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다원화된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 동서양의 혼합된 사고체계 안에 자리한다.
이것으로 본인의 동양화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갖는다.
1.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된다.
나의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이다.
2. 동양에서 말하는 '변화(變化)'란 서양의 '변화(change)'와는 다르다. 변(變)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한다면 화(化)에는 근원의 변화 또는 아이덴티티의 변화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근원적 변화로 아이덴티티를 창츨하는 행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가능성을 몸에 익히면서도 그것이 아닌 아이덴티티의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는 유기적 생성 그리고 고법古法에 구애됨 없이 자기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는
개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石濤 畵論>에서는 이와 함께 고 古 /경 經/권 權의 개념을 화'化'와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는데 '경'과 '권'이란 곧 영원한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 예술 행위에 있어서 결여될 수 없는 두 개의 축,즉 원칙과 상황의 적절한 넘나듦에 대한 의미로 경과 권에 대한 논리는 법'法'과 화'化'의 의미로 대체된다.
3.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따뜻한 만남: 시(詩)+수묵(水墨)+영상 "
나의 그림에는 화려한 슬픔과 철학적 낭만이 있다. 나의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된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한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4.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홍지윤의 사유(思惟) – 움직이는 水墨그림과 詩
동양화는 시(詩)이다.
본인작업에 있어서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작업은 자연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생각으로 詩를 짓고 글씨를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것이 水墨그림이 되고 때로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현대성,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되어 수묵영상이 된다.
이는 紙, 筆, 墨과 詩, 書, 畫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으로 전개된다.
수묵은 물과 먹에 의한 단순함과 자유로움, 자연스러운 다양함을 특징이며 정신이다. “홍지윤의 사유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라는 작업의 명제는 여기서 비롯되어 이를 담아내고자 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양화의 전통과 수묵화의 기법 그리고 형광안료를 사용하는 등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와 현대의 정서와의 만남을 통해
회화, 그래픽이미지, 영상, 설치 등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젊고 생기발랄하게 해석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동양화가 동양화의 전통과 현대 산업사회의 다양한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 방식을 제안하여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한다.
2) 작품의 구현 :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과 매체의 시용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
1.작업노트
2005 홍지윤의 思惟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
사계“四季”
....네 가지 계절에 대한 사유에는 화려한 슬픔과 철학적 낭만이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대한 일상의 감흥을 표현한 “사계(四季)”는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됩니다.
봄은 만물이 피어나는“화려(華麗)”로, 여름은 모든 감각기관이 열려져 만개한 상태 그대로의 “열정(熱情)”으로, 그리고 가을은 사라지기 직전의 것들에 대한 “우수(憂愁)”로, 겨울은 잠들어버린 모든 것에 대한“고독(孤獨)”으로 나타납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 -계절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네 계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니다....
2. 전시서문
2007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음유, 낭만, 환상 - 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성윤진, 문화일보갤러리 큐레이터 2007 서문발췌
.............<환상은 어디에>
작가는 환상을 시공간과 대유하며 순차적 정의를 내린다.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 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 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 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 vision)이든.
(홍지윤, 작업노트 중에서, 2007)
이번 전시의 모태가 된 ‘환상’의 인상은 익숙한 일상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감정들을 구체화 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터무니없지만, 즐거운 상상의 나래는 작가적 상상으로 발전하여 앞서 언급한 다양한 매체와 내용으로 작품에 발현된다. 따뜻한 홍차를 약속한 그녀의 초대(홍지윤의 詩, <초대> 中)를 따라 원효로와 청파동의 골목인상을 반갑게 맞이할 일이다.
서양인에게도 낮선
동양인에게도 낮선
그 간극에서.
초대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날
오후 3시 즈음에 이리로 오세요.
뿌연 겨울 해가 따뜻하고요.
그 해가 보이는 창가에는 조용한 새들이 가끔 날아가요.
그리고
바흐의 아리오조를 첼로독주로 들으면요
그 어떤 여행지보다
그 어떤 천국보다
더 천국 같거든요.
바닥엔 너무 깨끗하지 않게 먼지 몇 개 찬찬히 얹혀 져 있고요.
새로 단 표백하지 않은 베이지 빛 광목 커튼이
찬 겨울바람도 막아준답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가
좀 겨를이 나면
따뜻한 홍차도 끓여 드릴께요.
당신이 꼭 이 곳에 왔으면 좋겠어요.
3.
2008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인생은 아름다워: 꿈결같은 인생:인생은 아름다워
김최은영, 더 갤러리 큐레이터 2008 서문발췌
............홍지윤, 삶과 사랑을 소요하다.
전통의 방법을 막연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이기에 고수하고 있는 먹과 종이. 그런 그를 두고 화선지 위에 먹과 붓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넣었으니 굳이 옛문헌이나 기록에 의존한다면 현대판 문인화라고 끼워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먹으로 그린 후 미디어와 라이트박스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퓨전 동양화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렇게만 단정지어 부르고 싶지는 않다.
시를 짓고, 그림으로 노래하는 홍지윤은 문인보단 이 시대의 예술쟁이로, 퓨전 동양화보단 포스트 동양화로 더 질펀하고 더 폭넓게 제대로 놀아주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장자의 우화에서 나온 이야기 소요유消遙遊와 같다. 장자가 말한 유희는 단순한 의미를 너머 그 속에서 드러나는 자유스런 마음을 승화시켜 얻어지는 정신의 해방을 뜻한다. 이런 유희는 자발적이며 신명나는 유희이다. 내가 홍지윤의 그림을 보며 '한 판 논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니 어쩌면 홍지윤은 이미 삶과 사랑을 치열함을 넘어서 소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매체의 사용
Aliceon :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3월에 진행되었던 11회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홍지윤 작가는 ‘퓨전 동양화’ 작가로 알려져 왔습니다. 본인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 ‘퓨전 동양화’에 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추구하는 퓨전동양화는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화와 디지털의 만남을 기점으로 하여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제 작업은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하며 이는 동시대 미술을 이야기 합니다. 제 스스로의 작업이 지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하게 다가가서 함께 나누고 서로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Aliceon : (위 질문에 이어서) 개인 홈페이지에서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한다”라고 언급을 하셨는데, 동양화의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서의 영상 매체와의 결합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죠.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됩니다. 제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입니다. 동양화의 수묵과 영상과의 만남은 이러한 수묵 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결합이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제 작업은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Aliceon :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시다 보면, 기존 동양화 작업들과 다른 새로운 고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들인가요?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지필묵을 재료로 한다는 양식적 특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문인화의 개념에는 문학에서 말해져온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을 그린다는
상외지상(象外之象, 형상 밖의 표상 - 언제나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허의 상은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드러나게 된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켜 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부하며 생동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외지상(上外之象)이라고 하였다) 이라는 말에 의미를 둡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동양화가 단지 재료로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게는 정신성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이러한 동양화의 특성이 강한 제 작품을 가지고 기술적 변형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매체로써 동양화(지필묵)과 사진, 그래픽, 영상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써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둘의 성격을 한 선상위에서 이해하고 비교, 검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적이미지와 시각이미지, 무거움과 가벼움, 비움과 욕심, 수렴과 발산, 느림과 빠름,
종적사고와 횡적 사고, 모호함과 정확함,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이제는 제게 있어서 삶을 유추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문제들은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 믿음위에서 해결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민들이 단지작업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Aliceon : 예전 한 매체(2008 아트프라이스 1월호 - Artist Forum)와의 인터뷰에서 ‘작품과 작가의 삶이 일치하는가?’ 라는 질문에, ‘삶과 일치 한다. 삶을 詩로 적고 그것을 작품화 하는 것이 내 작업의 내용이기 때문이다’라고 답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삶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영상 매체가 지닌 특성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가요?
저는 오래전부터 그날의 삶을 하루하루 짧은 일기나 혹은 단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감성을 통해 정리되거나 혹은 그대로 풀어져서 한편, 한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어들을 정리하고 바라보면서 시가 가지게 되는 자체의 운율과 글씨자체가 가지고 있는 조형성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글과 글씨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았다가 늘어놓았다가 하며 또 다른 형태를 상상합니다. 이것들은 다시 이미지가 되어 편집프로그램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빠뜨릴 수 없는데 이는 또한 동양화의 지필묵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양한 농담을 담은 먹물은 단지 눈으로 보기에는 검은 먹물로만 보입니다. 이것이 시간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후 각기 다른 농담으로 화선지위에서 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시간을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 원래의 색을 보여주는 수묵의 특성은 삶의 과정과 닮아있다고 여겨졌고 특별히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묵그림이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서 편집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도 한 맥락위에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묵작업의 과정과 삶의 과정의 문제 그리고 수묵작업을 컴퓨터를 통해 매체화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존재하는 시간성은 최근 이야기 하고 있는 제 감수성에 대한 ’기록‘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기도 합니다.
감성을 시간성위에서 시각화 하는 데에 있어서 영상매체는 제게 있어서 수묵작업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웠고 작업의 경쾌한 진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작업의 특징을 말 할 때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제 작업에 있어서 영상 매체가 갖는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Aliceon : 홍지윤 작가의 작업을 보면, 한편의 영상 편지를 보는 듯 합니다. 일전의 언급을 보면, '나에게 움직이는 수묵그림-수묵영상은 시간의 흐름을 동양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하셨는데,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란 어떠한 의미인가요?
위의 답변과 연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저는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 또는 세월이지나면서 변화되어가는 사람들의 겉모습과 속마음, 그것들과 나와의 관계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어쩌면 제 작업이 이러한 부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성이 재빠르지 않고 단번에 무엇을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제 심성은 심사숙고하게 느린 속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수묵화의 재료적 특성과 닮아있습니다. 이제는 원래의 내가 그런 것이었는지 동양화를 그려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겠지만요.
2003년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본격적으로 수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1997경쯤부터 써온 편지나 일기 시 들을 엮어서 간간히 그려온 수묵드로잉들과 함께 엮어 만든 책입니다. 책의 제목을 지을 무렵 고심 끝에 책의 내용에 들어있는 시의 제목들을 죽 늘어놓고 보니 결국 지나가는 시간위에서 일어났던 또는 겪었던 감정들을 적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책을 출간한 이후 그러한 면에서의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고 본격적으로 수묵그림들과 시들을 영상에 담아보기로 하고 작업한 수묵영상 ‘가을날 저녁에’(2003)이 지금까지 수묵영상작업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수묵의 특성과 그것을 닮은 제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빨리 움직이는 세태나 여타의 영상작업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성을 가진 영상작업의 디테일에 있어서 느린 디졸브로 이어지는 편집방식에서 느림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느림 안에서 발생되는 빠르기와 또 다른 느림에 대한 생각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림’으로 대체되는 동양적 사고와 동양화 내 삶의 방법을 수묵영상작업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 라고 표현 해 본 것입니다.
Aliceon : 2005년작 <사계>와 같은 작품을 보면, 작가의 삶을 통해 느껴지는 감성이 ‘영상, 그래픽, 사진, 수묵화’ 등의 다양한 표현 방법과 압축된 ‘시(詩)’로 드러나는 듯 합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문인화에서 보여졌던 ‘시(詩) ․ 서(書) ․ 화(畵)’를 영상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에 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됩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동양화는 시(詩)입니다. 나의 작업은 詩를 짓고 그 시를 글씨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러한 시와 글씨가 水墨그림이 되고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영상이 되는 것이죠.
Aliceon :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시다 보면, 기존 동양화 작업들과 다른 새로운 고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들인가요?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지필묵을 재료로 한다는 양식적 특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문인화의 개념에는 문학에서 말해져온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을 그린다는
상외지상(象外之象, 형상 밖의 표상 - 언제나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허의 상은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드러나게 된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켜 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부하며 생동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외지상(上外之象)이라고 하였다) 이라는 말에 의미를 둡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동양화가 단지 재료로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게는 정신성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이러한 동양화의 특성이 강한 제 작품을 가지고 기술적 변형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매체로써 동양화(지필묵)과 사진, 그래픽, 영상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써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둘의 성격을 한 선상위에서 이해하고 비교, 검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적이미지와 시각이미지, 무거움과 가벼움, 비움과 욕심, 수렴과 발산, 느림과 빠름,
종적사고와 횡적 사고, 모호함과 정확함,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이제는 제게 있어서 삶을 유추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문제들은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 믿음위에서 해결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민들이 단지작업을 위한 것뿐만
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3) 작품의 의미 :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
본 장에서는 본인의 시공간적 사고체계가 압축되어 나타난 일상의 에피소드를
한 편의 詩로 적는다. 이는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이 개입된 본인의 사고체계와 본인의 작업과정과 방법에 대한 상징이자 은유이다. 또한 이는 총체적으로 볼 때,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칸트의 초월철학적 시공간의 개념을 지지하는 본인의 삶의 과정과 방법에
대한 논의이다. 먼저 은유적인 내면을 형상화환 각 詩語의 분석하여 각 시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한 후,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과 초월철학적 시공간의 개념이 다층구조를 이루는 본인의 작품을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으로 설정하여 작품의 의미 논해보고자 한다.
Episode
늦은 오늘도 아니고 이른 내일도 아닌 어두운 밤,
한 여름도 아닌데 그칠 것 같지 않은 소나기가 온다.
잠깐의 망설임, 낯선 문 앞, 뛰어 나간다.
그런 거다.
시간과 공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가슴이 움직일 수 있다면,
우산 없이도 퍼붓는 빗속을 뛰어 나갈 수 있다면.
Reply
‘늦은 오늘도 아니고 이른 내일도 아닌 어두운 밤’
먼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작업 또는 삶의 시공간 안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 해 보기로 한다.
‘한 여름도 아닌데 그칠 것 같지 않은 소나기가 온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작업 또는 삶의 시공간이 아닌 예측을 불허한 시공간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또한 외부로터 내면으로 두드림이 시작되고 또한 작업의 종결을 위한 시작이 이루어진다.
‘잠깐의 망설임, 낯선 문 앞,’
언젠가 집으로 떠나야 한다는 결정상황의 전재위에서 그리고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
결정상황의 전재위에서 시점과 시점을 이루는 공간은 불가분 한 몸이다.
‘잠깐’은 고유한 자신만의 본성과 뇌구조와 생활방식의 속성에 기반을 둔 개인적인 시간의 척도이자 정도의 문제이며 이것과 저것 또는 그 어떤 것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함과 산재함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에 대한 유보와 선택에 대한 속성의 문제를 말한다.
‘잠깐’에 대한 시간적 속성에는 얼마나 많은 느리거나 빠름의 시간적 불확실성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망설임’이 말하는 심리적 불확실성 안에는 또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지금, 1분 후, 5분 후, 한 시간 후, 아니면 .... ? 그리고 또한 ‘낯선 문 앞’ 이 말하는 낯선 공간의 속성에는 또 얼마나 다양한 낯설음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모호함과 산재함의 지점에서 본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상충과 충돌 그리고 화해의 범람이 이루어진다.
‘뛰어 나간다.’
다양한 가능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추하고 검증을 거친 후 내가 정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고와 이것이 이루어내는 방법으로 내면의 실체는 표출된다. 즉 작품화되어진다.
‘시간과 공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속성에는 이 둘에 의해 살아가고 행동하는 일종의 규율로써 객관적인
내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함의가 있다. 그러나 내가 개입되기 시작한 과정을 통해서
이미 시공간은 나의 시공간이 되었고 이제 나는 내가 주체가 되어 나로부터 기인하는 시간과 공간을 운용하게 된다. 이는 철저히 동양적 사고체계에서 기인하며 실제로 본인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은 현실, 즉 시공간의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본인의 작업에서 또는 삶의 방식에서 시공간이란 존재하지만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과도 같다.
이는 2007년 개인전 <음유, 낭만, 환상>과 연결고리를 갖는다.
이러한 본인의 작업경향을 최근전시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인생은 아름다워: 꿈결같은 인생:인생은 아름다워 2008에서 김최은영(미학)은 이렇게 말한다.
“ ............홍지윤, 삶과 사랑을 소요하다.
전통의 방법을 막연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이기에 고수하고 있는 먹과 종이. 그런 그를 두고 화선지 위에 먹과 붓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넣었으니 굳이 옛문헌이나 기록에 의존한다면 현대판 문인화라고 끼워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먹으로 그린 후 미디어와 라이트박스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퓨전 동양화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렇게만 단정지어 부르고 싶지는 않다.
시를 짓고, 그림으로 노래하는 홍지윤은 문인보단 이 시대의 예술쟁이로, 퓨전 동양화보단 포스트 동양화로 더 질펀하고 더 폭넓게 제대로 놀아주길 희망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장자의 우화에서 나온 이야기 소요유消遙遊와 같다. 장자가 말한 유희는 단순한 의미를 너머 그 속에서 드러나는 자유스런 마음을 승화시켜 얻어지는 정신의 해방을 뜻한다. 이런 유희는 자발적이며 신명나는 유희이다. 내가 홍지윤의 그림을 보며 '한 판 논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니 어쩌면 홍지윤은 이미 삶과 사랑을 치열함을 넘어서 소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본인은 이 지점에서 이성과 인식의 재료들은 모두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험론과
사물의 본성에 관한 탐구는 우리 정신의 본성에 있는 본유 관념에 대한 탐구라는 이성론을 결합한 칸트의 시공간과 지성의 범주 그리고 초월철학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칸트는 우리의 이성이 우리 밖의 사물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감각이며
감각 재료 없이는 결코 실질적 내용을 가진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또한 감각 자료들은 잡다한 것으로 정리 정돈될 때 하나의 사물이 인식될 수 있지만 이러한 정돈의 틀은 감각 자료에 있지 않다고 한다. 이 틀은 우리 인식 능력이 스스로 마련한 선험적(a priori)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가 감성의 형식인 시간, 공간 표상이고 둘째는 지성의 형식인 순수한 지성 개념이다.
1. 공간, 시간은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모든 사물들의 관계의 객관적인 질서 틀이지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에게 감지되는 사물의 실재 규정이되, 감각될 수 없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관념으로 본다는 것이다.
2. 지성의 범주를 말할 때, 시간과 공간 질서 표상에 따라 일차로 정돈된 감각재료들은
양(단일성, 다수성, 전체성), 질(실재성, 부정성, 제한성), 관계(실체-속성, 원인-결과, 상호작용), 양태(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의 표상에 따라 종합된다.
이때에야 비로소 하나의 어떤 무엇이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종합을 '사고'라 부르고 사고 작용하는 이성의 기능을 지성이라 부른다.
이는 순수 지성의 근원 개념이고 사고 형식으로 기능하다는 의미에서 범주다.
3. 시공간과 범주의 틀을 따르는 우리 의식의 인식 작용에 우리에게 인식되는 사물은
규정을 받는다. 그가 말하는 초월철학에 대하여 경험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동시에 경험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된다. 의식의 선험적인 원리들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자 인식된 사물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의식의 이런 기능을 칸트는 초월적이라 부른다. 인간의 초월적 의식은 세계를 형성하는 물질적 재료까지를 만들어 내지는 않지만, 존재자의 보편적 존재규정이 된다고 보아 인간 이성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상 세계의 창조자라고 말한다.
‘가슴이 움직일 수 있다면,’
빗속을 뛰어나가기 전까지의 내면안에서의 검증은 이미 나로부터 기인하는 시공간을 만들었고 거기에 ‘나’라고 하는 주관적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산 없이도 퍼붓는 빗속을 뛰어 나갈 수 있다면.
이제 결정과 표출을 담당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도구나 답습체계를 의식하지 않고
본인이 정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내는 방법을 따라 내면의 실체를 표출하게 되었다. 피부에 닿는 퍼붓는 비의 감각을 느끼듯 신체적 쾌락의 산재된 의미가 개입된
직관적 감각에 의한 작업과정은 자기부정과 자기모순에 대한 긍정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검증을 통해 안주하지 않는 도발적 자아를 빌어 정해진 질서로부터 도주하여 질서를 어지럽힌다. 그리고 이질적이며 얌전하지 않은 역동적 실험의 형태로 본인 자신을 도구화한다.
이로써 본인은 작업 자체를 기존의 것에 순응하지 않는 못된 쾌락의 장으로 삼으며
또한 이로써 쾌락적 배설의 시공간에 귀착하게 된다.
3. 결론
작가로써 본인의 에너지는 느림과 고요와 그리고 자유로움에서 기인하며 다양함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연유한다. 이것의 배경에는 동양적 시공간성이 자리한다. 특히 최근의 작업에 나타나는 디지털 매체와의 혼용에서 ‘동양적 시간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서 본인은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과 매체의 사용에 있어서 본인의 미디어 작업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로 정의하였다. 다음은 그것의 요약이다.
'시간성‘이라는 개념은 동양화의 지필묵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이다. 예를 들면 다양한 농담을 담은 먹물은 단지 눈으로 보기에는 검은 먹물이 시간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후 각기 다른 농담으로 화선지위에서 본 모습으로 남게 된다. 본인에게 있어서
시간이 지나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 원래의 색을 보여주는 수묵의 특성은 삶의 과정과 닮아있다고 여겨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묵그림이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서 편집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한 맥락위에서 다가왔다.
그리고 수묵작업의 과정과 삶의 과정의 문제 그리고 수묵작업을 컴퓨터를 통해 매체화
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존재하는 시간성은 최근 이야기 하고 있는 본인의 감수성에 대한 ’기록‘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게 된다. 감성을 시간성위에서 시각화 하는 데에 있어서 영상매체는 본인에게 있어서 수묵작업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웠고 작업의 경쾌한 진행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는 작업의 특징을 말 할 때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본인의 작업에 있어서 영상 매체가 갖는 특성이 된다.
본인은 계절과 세월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라 변해가는 사람들의 겉모습과 속마음, 그것들과 나와의 관계를 예민하게 느낀다. 본인의 작업은 언제부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어쩌면 이러한 부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천성이 재빠르지 않고 단번에 무엇을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본인의 심성은 심사숙고하게 느린 속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수묵화의 재료적 특성과 닮았다.
이제는 원래의 내가 그런 것이었는지 동양화를 그려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겠지만. 2003년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는 본격적으로 수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1997경쯤부터 써온 편지나 일기 시 들을 엮어서 간간히 그려온 수묵드로잉들과 함께 엮어 만든 책이다. 지나가는 시간위에서 일어났던 또는 겪었던 감정들을 적어 놓았던 책을 출간한 이후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고 본격적으로 수묵그림들과 시들을 영상에 담아보기로 하고 작업한 수묵영상 ‘가을날 저녁에’(2003)이 지금까지 수묵영상작업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다.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수묵의 특성과 그것을 닮은 본인의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빨리 움직이는 세태나 여타의 영상작업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성을 가진 영상작업의 디테일에 있어서 느린 디졸브로 이어지는 편집방식에서 느림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느끼는 느림 안에서 발생되는 빠르기와 또 다른 느림에 대한 생각들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림’으로 대체되는 동양적 사고와 동양화 그리고 내 삶의 방법을 수묵영상작업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 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여기에 상충과 충돌 그리고 화해 모호함과 산재함을 작업의 과정에 개입시킨다.
여기에서 단지 동양화와 매체와의 만남 또는 문화와 문화와의 만남을 넘어선 근본적인 개념의 <퓨전>이 연유하며 이러한 작업의 도구는 양자성이 아닌 다양성을 활보하며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다원주의적 중층구조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상충과 충돌, 모호함과 산재함 그리고 <퓨전동양화>라는 키워드로 읽혀지는
본인의 작업에는 크게 두 가지 함의가 있다. 하나는 시공을 벗어난 폭넓은 사고를 보게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동양화 작가로서의 태생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다.
이는 부정적인 견해라고는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오늘날의 다원주의 미술에 있어서 그리고 예술의 범주 안에서 이미 서구작가의 작업이 동양적 사고의 차용을 가능하게 했듯이 해법을 달리할 뿐 작업의 주체자로서 동양인인 본인의 작업도 또한 서양적 사고의 차용을 가능하게 하는 다원주의적 추론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미술의 현상으로서 뿐만이 아니다.
다원주의 미술에서 말하는 바인 미술가의 근본적인 사고체계가 만드는 미술역할의 확산 또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하다.
추후 본인의 작업은 이제까지의 작업을 말하는 성윤진의 말대로 서양인에게도 낮선, 동양인에게도 낮선 그 간극의 연장 선상위에 있을 수도 있고, 그 간극에 존재하는
상충과 충돌, 모호함과 산재함으로부터의 수많은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본인의 사고와 모든 것이 자유로운 다원주의 미술 안에서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낙관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작가적 정체성이 명쾌하게 드러나는 자유롭고 건강한 작업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공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동서고금’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소요’라는 말이 있다. 본인의 작업은 이러한 시공간의 의미 안에서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먼저 본인을 둘러싼 시공간 안에서 자아를 배출하는 것에 작업의 목적을 두어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배설의 장소로써 시공간을 활용하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