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y Twombly와 본인작품에 나타난 동양적 사고에 대하여
작성자
hongjiyoon
작성일
2015-02-25 04:52
조회
2283
Cy Twombly와 본인작품에 나타난 동양적 사고에 대하여
Roland barthes의 ‘The Wisdom of Art’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글
2. 본론
1) Cy Twombly 작품의 개요
2) Roland barthes의 ‘예술의 지혜 The Wisdom of Art’
3) 본인작품의 개요
4)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홍지윤의 사유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
3. 결론
1. 들어가는 글
Cy Twombly의 작품의 특징은 모호함과 산재함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그림과 글씨 낙서등으로 표현되어지는 그의 작품에는 여타의
서양 작가와는 구별되는 빈 공간과 공들여 그리지 않아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서정성이
엿보인다. 본인은 서양의 고전에 나타나는 일화와 신화의 인물들, 예술가,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따뜻한 풍광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작품세계에서 화가로써의 낙관적 태도와 한 인간으로써의 밝고 긍적적인 삶의 태도를 짐작하게 되었다.
후기 구조주의 이론가인 Roland barthes의 ‘The Wisdom of Art’는 롤랑바르트가 1979년 휘트니미술관 <사이 톰블리전>에 부친 글이다. 그림과 글씨와 낙서가 특징을 이루는 그의 작품의 의미와 그의 작품에 존재하는 동양적 내면의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연히 그은 것처럼 여기 저기 긁히고 얼룩졌으며 더럽혀진 것같이 보이는 톰블리의 그림에서 동양적인 비어있음의 공간을 발견하고 이를 선과 결부시킨다.
바르트는 톰블리의 그림을 통해서 서양의 바깥으로서의 동양에서 새로운 회화의 윤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목이 말하는 그대로 그것은 톰블리 예술의 특징임과 동시에 예술의 지혜로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인은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이 글에서 서양인인 Cy Twombly의 작업에 나타난 동양적 사고체계에 집중한다.
‘퓨전동양화’가 키워드인 본인 작업의 특징은 동양화의 근간을 이루는 詩, 書, 畵의 개념과 書畵一體의 개념을 지필묵과 형광안료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본인작업의 분명한 특성을 이루는 동서고금의 문화와 예술, 일상적 삶에 대한 시적 체험에서 비롯된 일상의 습관적인 詩作은 그림과 글씨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긴장감이 개입된 충돌과 화해가 존재하며 ‘상충의 미학’을 기반으로 하며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양화를 연구하는 본인의 작업에 개입된 삶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은 기본적으로
동양적 사유체계에 기점을 두며 이제 더 이상 동서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다원화된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 동서양의 혼합된 사고체계 안에 자리한다.
이것으로 본인의 동양화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갖는다.
본인은 Cy Twombly와 본인의 작업에서 막연하게나마 양자 간의 어떤 관계를 느낀다.
이 글에서는 그 막연함에서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를 전재로 하고
작품의 시각적 표현과 내적 사고 그리고 작가적 태도에 대한 Cy Twombly와 본인 작업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먼저 Cy Twombly의 개요를 적고 Roland barthes의 ‘The Wisdom of Art’를 발췌, 요약하여 Cy Twombly의 작품세계와 동양적 사고체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후 본인의 시와 글씨 그리고 그림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에 대한 개요와
작품을 소개하고 Cy Twombly의 작품세계와의 관계성을 짐작하게 하는
본인의 인터뷰 글 (미디어 아트 채널 엘리스 온 www.Aliceon.net / 홍지윤, 새로운 동양화 존재방식을 제안한다_interview 2008.05.14 )과 2007년 개인전을 위한 작업노트와 전시서문(성윤진, ‘음유 낭만 환상-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비평을 첨부하여 본인작업의 특징과 작업에 나타나는 사고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하겠다.
결론에서는 Cy Twombly와 본인의 작업에 있어서의 관계를 유추해 보도록 하고
예술의 지혜에 대해 서술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본인작품에 존재하는 동양적 사고의 흐름을 한편의 시를 통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본인의 작업 안에 내재한 모호함이 가능성의 힘으로 환원되기를 바라며 또한 예술의 지혜로움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라며.
2. 본론
1) Cy Twombly 작품의 개요
사이 톰블리 (Cy Twombly, 1928.4.25~)는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이다.
특유의 선묘와 상징적인 기호들, 서투른 글자체와 숫자 등이 어우러진 그림과 낙서, 드로잉을 장난스럽게 결합하는 매체들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독창적인 양식을 선보이며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나타낸다. 또한 때로는 휘갈겨 쓴 서체의 흔적들로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연상시키며 폭발할 듯한 강한 에너지를 화면에 담아 강렬하고 색다른 시각적, 예술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유럽 지중해의 오래된 건축과 신화의 이미지를 특유의 선묘와 상징적인 기호로 풀어낸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직관적이다.
Cy Twombly는 1928년 미국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태어났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보스톤 미술관학교와 뉴욕의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1951년 동료인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권고로 블랙마운틴대학에 입학하여 1952년까지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과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벤 샨(Ben Shahn)에게 사사했으며 음악 감독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기도 했다.
폴 클레(Paul Klee)와 클라인경향의 작품으로 1951년 뉴욕 쿠츠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버지니아 미술관의 지원을 받아 북아프리카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였고 1959년 이탈리아 로마로 이주하여 로마에서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로마를 근거지로 삼고 뉴욕 화단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술 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196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4년 후 밀워키 아트센터 주최로 첫 번째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후 유수의 미술관에서 작품 전시가 있었다.
한편 1995년에는 텍사스 휴스턴 메닐 컬렉션 내에 사이 톰블리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디자인한 이 컬렉션에는 1953년부터 1994년 사이에 제작된 회화, 조각, 드로잉, 기타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톰블리는 현재 렉싱턴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살고 있다.
2) Roland barthes의 ‘예술의 지혜 The Wisdom of Art’
기호학과 시각예술 / 김융희, 양은희 옮김 / 시각과 언어 출판사 / 1985 발췌
P.252-P.253
Ι .
톰블리는 재료(연필자국, 오일, 종이, 캔버스 ...)를
목적을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영광 속에서 발현된 절대적인 소재로 강요한다.
톰블리의 재료는 연금술사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제1질료 materia prima이다.
제1질료는 의미에 의해 이루어지는 분할이전에 존재한다.
톰블리의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보게 해 주는 데 있다.
물질을 펼쳐놓은 것이 아니라 흔적을 남겨놓게 하는 비밀을 지닌 예술이다.
연필의 특성을 표현하기위해 재료의 압력을 억제함으로써 그리고 종이위에 연필가루가 약간 흩뿌려지도록 거의 무기력한 태도를 취하게 함으로써 “좋은 것은 가볍다”라고 했던 니체의 명제를 확인시킨다.
재료가 하나의 사실pragma로 나타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위해 톰블리는 기법이 아니라 적어도 습관을 가졌다.
톰블리의 독창적인 예술을 만들어주는 것은 습관의 조합, 배열, 분포이다.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지만 톰블리의 문장은 모방될 수 없는 것이다.
- 톰블리의 회화적 요소 (덧붙이는 방법 via de porre)
1) 긁기 scratching.
2) 얼룩만들기 smuding 얼룩보다는반점 macula
3) 더러움 - 그 자국들을 원치 않아서 지우려 하는 듯이 다른 자국들로 뒤덮는 것 같다.
망쳐 지워버리려 하는 체 한다. 그리고 지워 없앤 것을 다시 망친다.
두 차례에 걸친 실패는 일종의 팔랭프세스트palimpseste
: 씌여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거듭 다시 쓴 것. 를 생산한다.
그것은 가벼운 구름이 서로 상쇄되지 않고 하나가 다른 하나 앞을 지나가는 하늘과 같은
깊이를 캔버스에 부여한다.
P.254
어떤 재료를 사실로 정립하려는 이러한 제스쳐들은 더러운 어떤 것을 만드는 일과 결부되어있다. 그 본질을 설명 해 주는 것은 더럽고 방치된 것에서이다.
사물의 진리는 폐물에서 가장 잘 읽혀진다.
붉은 색의 진리는 얼룩 속에서이며 연필의 진리는 불안정한 선속에서 이다.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이데아’는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규제된 번쩍이는 형상이 아니라
어슴프레한 바탕에 희미하게 흔들리는 얼룩들이다.
+또 다른 사건
글로 쓰여진 사건들인 ‘이름들’
타이포그라피와는 다른 유치하고 불규칙한 서투른 것
메카니즘의 순수성
ex) 비르길리우스 / 이탈리아인들 : 유추
발레리에게 / 타틀린느에게 : 캔버스는 부재하며 준다는 행위만 남는다.
그리고 최소한의 글쓰기만이 남는다.
P.255 ~ 256
Ⅱ.
그리스어로 '티케 Tyche' 는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을 뜻한다.
톰블리의 캔버스는 항상 어떤 우연에서 비롯되는 어떤 힘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우연의 효과이거나, 좀 더 정밀하게 말한다면 영감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영감이란 우연의 행복과 같은 창조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움직임과 하나의 효과가 이같은 효과를 설명한다.
1.‘내던져진 것 jete'과 같은 인상
물질이 캔버스 복판에 내던져진 것처럼 보이는데 내던짐이란
최초의 결정과 최후의 우유부단함이 동시에 담겨진 행위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내던질 때 , 나는 하는 행위에 대해서 알고 있으나,
그것이 말들어낼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톰블이의 방식은 우아하고 유연하며 ‘긴’것이다.
2.분산의 외양
이는 내던짐의 결과와 같다.
톰블리의 캔버스위에는 요소들이 여백에 의해서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작품에서 글쓰기와 회화를 혼합할 때 자주 기대고 있는 동양화와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여백은 단지 조형성만을 가지고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호흡을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미묘한 에너지와 같다.
철학자 바슐라르 - 나는 공중에서 부유하며 공중에서 호흡한다. ((퐁텐블로의 학교))
내던짐과 분산에 연결된 상태는 희박함Rare 이다.
비어있는 공간과 우연 tyche 이라는 관념 은 어떻게 관계하는 것 일까 ?
(발레리의 강연 : 콜레주 드 프랑스 College de France의강연 1944년5월5일)
1.작품은 정해진 계획에 응한다.
2.예술가는 상상의 사각형을 메꾼다.
: 톰블리는 희박함의 원칙 즉 공간의 원칙에 따라 사각형을 채워나간다.
일본미학 - 간격에 대한 미묘한 범주를 알고 있다.(‘마’門 )
마=라틴어의 Rarus=톰블리의 예술
희박한 사각형은 두 가지 문명을 가리킨다.
1. 서예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동양예술의 ‘비어있음’
2. 톰블리의 공간인 지중해적 구도
톰블리의 그림은 정신이 가득 채우려는, 사라지고 있는 요소들rari과 함께 있는 무덥고 빛나는 지중해풍의 대저택인 것이다. (발레리)
P.257
Ⅲ.
<마르스와 예술가> Mars and the Artist
collage of oil, charcoal, and crayon on paper.
Alessandro Twombly collection
<마르스와 예술가> Mars and the Artist 는 형상적인 요소와 철자적인 요소가 결합된 그림문자처럼 기능한다.
톰블리의 작품 중 유일하게 형상화와 의미작용이 결합된 문제를 설명 해 준다.
추상화: 의미의 문제 - 회화 앞에서 그것이 재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것
톰블리의 표제: 의미의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진다.
미로의 기능을 가진다. 매우 지적이며 매우 감각적인 희귀한 방식을 따르는 에술이며 그 희귀한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험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고 불리는 신비주의 학파들의 방식으로 부정성의 체험을 계속하게 한다.
톰블리의 효과: 고답파에서 상징주의로 이어지는 19세기의말의 프랑스 문학유파가 사용했던 매우 엄밀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톰블리의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
‘효과’는 시에 의해서 암시되는 일반적인 인상, 육감적이며 가장 시각적인 인상이다.
이 효과의 특성은 그 일반성이 실제로는 절대 분해 될 수 없으며 국소화된 세부사항의 부가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효과란 수사학적인 속임수가 아니다.
그것은 인상(메세지)의 깨어지지 않는 통일성과 그것의 원인들이나 요소들의
복합성이라는 역설에 의해 정의된 감각의 진정한 범주이다.
P. 260 -262
문화의 어떤 형식
1. 톰블리의 문화는 고전적인 것이다.
그리스나 라틴문학에서 전이된 신화적인 사실들에 직접적으로 의거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회화속에 삽입하고 있는 ‘작가들’은 휴머니즘시인들(발레리, 키이츠)이거나 고대로부터 자양분을 받아 성장한 화가들(푸생, 라파엘로)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환기되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그리스 신들로부터 현대적인 예술가로 이어진다.
그 연결고리는 오비드와 푸생이다.
고대인들과 시인들 화가들을 결합시킨다.
시인 발레리에게의 헌정
- 화가의 그림과 시인의시 한편이 동일한 제목 ‘비너스의 탄생’을 갖고 있다.
두 작품은 해안선에서의 출현이라는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톰블리의 효과‘에 열쇠를 제공한다.
2. 톰블리의 효과 = “지중해”는 추억과 감각의 거대한 복합체
톰블리의 그림에 나타나는 언어들(그리스어와 라틴어)은 역사적이고 신화적이고 시적인 문화와 / 땅위의 풍경과 / 바다 해면과의 접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태와 / 색과 빛의 총체적 삶을 말한다.
3. 톰블리의 집
나폴리만에 있는 프로시다 섬
:빛, 하늘, 땅, 바위와 아치의 곡선 바로 그것이 비르길리우스이고 또한 톰블리의 그림이다. -톰블리의 그림에서 하늘과 바다의 공허함, 매우 가벼운 지상의 흔적 (보트 ,곶)하늘의 푸르름 , 바다의 쟂빛, 새벽빛의 핑크색을 찾을 수없는 그림은 하나도 없다.
P. 262
Ⅳ.
톰블리의 그림속에 나타난 지중해적 효과
A .
톰블이의 효과들은 거만한 품위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톰블리 그림의 놀라움apodeston , 엉뚱함 , 조롱, 수축, 장엄함의 파괴, 서투르게.
희박한 사각형 , Rarus, 문(門)
톰블리의 그림에서 선(禪)의정신을 재발견한다.
이성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연구되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경험이 실재로 존재한다.
그것 이 깨달음이다. = 계시 illumination, 각성 awakening,
불교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심적인 충격일 것이다.
모든 종류의 형식이나 인과관계와 단절된 비어 있는 진리
B . 선의 깨달음
: 비이성적이며 우리의 종교적인 체험과 결부된 진지함에 도전하는 부조화스런 놀라운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톰블리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무례함, 충동, 미세한 깨달음
c . 캔버스에 나타난 글쓰기
문자기호를 쓸 때마다 그림의 자연스러움의 충격과 동요가 있다.
1. 눈금, 숫자, 작은 산술 기호 등 회화의 권위 있는 비실용성과 계산의 실용적인 기호
사이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
2. 그림
3. 끊임없이 반복되는 손의 ‘서투름’
톰블리에게 있어서 문자는 장식문자나 인쇄문자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세련되지 않은 글씨
톰블리는 문자요소를 사용함으로써 거의 언제나 자기 자신의 그림에 모순을 도입한다.
‘희박함’에 더해진 ‘서투름’, ‘어색함’은 고전적 문화에서 발견되는 경향을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마치 그림이 문화와 싸우고 있었던 것처럼, 과정된 담론을 집어던지고 아름다움만을 보유한다.
톰블리의 예술은 폭력의 예술이상으로 동요의 예술이며, 그리고 동요는 폭력보다도 더 전복적인 경우가 많다.
바로 그것이 행동과 사고에 대한 어떤 동양적 양상의 교훈인 것이다.
P.264~265
Ⅴ.
그리스어로 드라마drama는 어원적으로 ‘행하다’라는 개념과 결부 되어있다.
드라마란 행하여지는 것인 동시에 캔버스 위에서 현인의 것을 가지고 상연되는 것을 의미한다. 톰블리의 작품 속에서 두 가지의 행위, 혹은 두 가지 무대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행위를 본다.
1. 첫 번째 유형의 행위는 일종의 문화적 재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 고전적인 문화의 유형
ex. 바쿠스제의 5일, 비너스의 탄생...역사적 행위들은 이름에 의해 환기된다.
고전적인 회화에서는 ‘발생하고 있는 것’이 회화의 주제인데 톰블리의 주제는 ‘일화적인 것’이다.
톰블리에게 있어 주제는 개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고전적인’ 텍스트이다.
그것은 기묘한 개념이며, 욕망의 대상, 사랑의 대상, 어쩌면 향수의 대상이기 때문에
참되다.
2. 두번째 유형의 행위 : 주제와 대상
프랑스어에는 어휘상 유용한 애매성이있다.
‘주제sujet'가 때로는 작품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산출하는 인간존재가 있는데
그 인간존재는 거기서 말하여진 것의 암묵적 저자로 형상화된다.
톰블리에게 있어서 ‘주제’는 물론 그림이 말하고 있다.
1. 주제-대상은 글로 쓰여진 암시일 뿐이다.
2. 주제는 톰블리 자신이다.
3. 그림의 주제는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인 당신과 내가 된다.
그림을 바라보는 주체들이 다양하다는 것과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 앞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담론의 유형이
주체의 유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P.266~268
톰블리의 작품을 바라보는 주체들
1. 문화의 주체
2. 전문성의 주체
3. 즐거움의 주체
4. 기억의 주체
5. 생산의 주체 - 같은 것을 하고 싶다는 욕망
그는 지나치게 원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한다.
그는 도(道)의 성애적 예술과 관련된 방식으로 성공한다.
강렬한 쾌락은 억제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둔함에 대한 끊임없는 승리
: 필획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 - 화가를 독특하게 하는 것
‘내던져짐’의 인상 , 흔적들의 분산
: 의도된 방향이 있는 것 같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어떤 방향이 부여되어 있다.
톰블리의 열쇠 - Rarus '산재'
그의 예술은 역설적이며, 그 안의 간결함이 장엄하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간결한 것은 압축된 것처럼 보인다. 희박성은 밀도를 낳고 , 밀도는 수수께끼를 낳는다. 톰블리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발전이 일어난다. 확실히 침묵,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매우 아련한 그 표면의 지글거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적극적인 힘이다.
도가 말하기를 “존재는 가능성을 부여하며 , 우리가 그 가능성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 비-존재를 통해서이다. ”
톰블리의 예술은 그 어떤 것도 포착하지 않는다. 그는 미묘하게 손을 움직이는 욕망과
매혹적인 야망을 신중히 거부하는 정중함 사이에서 위치하며 부유하고 표류한다.
만일 우리가 이 같은 윤리를 정착시키기를 원한다면
아주 멀리 회화의 바깥, 서양의 바깥, 역사의 바깥에서 , 의미의 한계 자체에서만 오직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톰블리의 윤리, 그의 위대한 역사적 독특함이 있다.
= 모호함 그리고 힘
도덕경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무것도 빌리지 않고서도 만들어 내며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서도 행동하며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작품은 남을 것이다.
3)본인 작품의 개요
작업의 개념
.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된다.
나의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변화(變化)'란 서양의 '변화(change)'와는 다르다. 변(變)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한다면 화(化)에는 근원의 변화 또는 아이덴티티의 변화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근원적 변화로 아이덴티티를 창츨하는 행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가능성을 몸에 익히면서도 그것이 아닌 아이덴티티의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는 유기적 생성 그리고 고법古法에 구애됨 없이 자기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는
개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石濤 畵論>에서는 이와 함께 고 古 /경 經/권 權의 개념을 화'化'와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는데 '경'과 '권'이란 곧 영원한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 예술 행위에 있어서 결여될 수 없는 두 개의 축,즉 원칙과 상황의 적절한 넘나듦에 대한 의미로 경과 권에 대한 논리는 법'法'과 화'化'의 의미로 대체된다.
2.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따뜻한 만남: 시(詩)+수묵(水墨)+영상 "
나의 그림에는 화려한 슬픔과 철학적 낭만이 있다. 나의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된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한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4)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홍지윤의 사유(思惟) – 움직이는 水墨그림과 詩
1. 동양화는 시(詩)이다.
본인작업에 있어서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작업은 자연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생각으로 詩를 짓고 글씨를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것이 水墨그림이 되고 때로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현대성,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되어 수묵영상이 된다.
이는 紙, 筆, 墨과 詩, 書, 畫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으로 전개된다.
수묵은 물과 먹에 의한 단순함과 자유로움, 자연스러운 다양함을 특징이며 정신이다. “홍지윤의 사유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라는 작업의 명제는 여기서 비롯되어 이를 담아내고자 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양화의 전통과 수묵화의 기법 그리고 형광안료를 사용하는 등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와 현대의 정서와의 만남을 통해
회화, 그래픽이미지, 영상, 설치 등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젊고 생기발랄하게 해석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동양화가 동양화의 전통과 현대 산업사회의 다양한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 방식을 제안하여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한다.
2. 미디어 아트 채널 엘리스 온 www.Aliceon.net / 홍지윤, 새로운 동양화 존재방식을 제안한다_interview 2008.05.14 Aliceon0804 interview q&a sheet _ 홍지윤 발췌
Aliceon :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3월에 진행되었던 11회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홍지윤 작가는 ‘퓨전 동양화’ 작가로 알려져 왔습니다. 본인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 ‘퓨전 동양화’에 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추구하는 퓨전동양화는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화와 디지털의 만남을 기점으로 하여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제 작업은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하며 이는 동시대 미술을 이야기 합니다. 제 스스로의 작업이 지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하게 다가가서 함께 나누고 서로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Aliceon : (위 질문에 이어서) 개인 홈페이지에서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한다”라고 언급을 하셨는데, 동양화의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서의 영상 매체와의 결합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죠.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됩니다. 제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입니다. 동양화의 수묵과 영상과의 만남은 이러한 수묵 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결합이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제 작업은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Aliceon : 예전 한 매체(2008 아트프라이스 1월호 - Artist Forum)와의 인터뷰에서 ‘작품과 작가의 삶이 일치하는가?’ 라는 질문에, ‘삶과 일치 한다. 삶을 詩로 적고 그것을 작품화 하는 것이 내 작업의 내용이기 때문이다’라고 답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삶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영상 매체가 지닌 특성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가요?
= The Wisdom of Art P.255 ~ 256
일본미학 - 간격에 대한 미묘한 범주를 알고 있다. (‘마’門 )
저는 오래전부터 그날의 삶을 하루하루 짧은 일기나 혹은 단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감성을 통해 정리되거나 혹은 그대로 풀어져서 한편, 한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어들을 정리하고 바라보면서 시가 가지게 되는 자체의 운율과 글씨자체가 가지고 있는 조형성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글과 글씨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았다가 늘어놓았다가 하며 또 다른 형태를 상상합니다. 이것들은 다시 이미지가 되어 편집프로그램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빠뜨릴 수 없는데 이는 또한 동양화의 지필묵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양한 농담을 담은 먹물은 단지 눈으로 보기에는 검은 먹물로만 보입니다. 이것이 시간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후 각기 다른 농담으로 화선지위에서 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시간을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 원래의 색을 보여주는 수묵의 특성은 삶의 과정과 닮아있다고 여겨졌고 특별히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묵그림이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서 편집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도 한 맥락위에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묵작업의 과정과 삶의 과정의 문제 그리고 수묵작업을 컴퓨터를 통해 매체화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존재하는 시간성은 최근 이야기 하고 있는 제 감수성에 대한 ’기록‘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기도 합니다.
감성을 시간성위에서 시각화 하는 데에 있어서 영상매체는 제게 있어서 수묵작업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웠고 작업의 경쾌한 진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작업의 특징을 말 할 때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제 작업에 있어서 영상 매체가 갖는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Aliceon : 홍지윤 작가의 작업을 보면, 한편의 영상 편지를 보는 듯 합니다. 일전의 언급을 보면, '나에게 움직이는 수묵그림-수묵영상은 시간의 흐름을 동양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하셨는데,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란 어떠한 의미인가요?
위의 답변과 연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저는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 또는 세월이지나면서 변화되어가는 사람들의 겉모습과 속마음, 그것들과 나와의 관계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어쩌면 제 작업이 이러한 부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성이 재빠르지 않고 단번에 무엇을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제 심성은 심사숙고하게 느린 속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수묵화의 재료적 특성과 닮아있습니다. 이제는 원래의 내가 그런 것이었는지 동양화를 그려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겠지만요.
2003년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본격적으로 수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1997경쯤부터 써온 편지나 일기 시 들을 엮어서 간간히 그려온 수묵드로잉들과 함께 엮어 만든 책입니다. 책의 제목을 지을 무렵 고심 끝에 책의 내용에 들어있는 시의 제목들을 죽 늘어놓고 보니 결국 지나가는 시간위에서 일어났던 또는 겪었던 감정들을 적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책을 출간한 이후 그러한 면에서의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고 본격적으로 수묵그림들과 시들을 영상에 담아보기로 하고 작업한 수묵영상 ‘가을날 저녁에’(2003)이 지금까지 수묵영상작업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수묵의 특성과 그것을 닮은 제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빨리 움직이는 세태나 여타의 영상작업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성을 가진 영상작업의 디테일에 있어서 느린 디졸브로 이어지는 편집방식에서 느림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느림 안에서 발생되는 빠르기와 또 다른 느림에 대한 생각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림’으로 대체되는 동양적 사고와 동양화 내 삶의 방법을 수묵영상작업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 라고 표현 해 본 것입니다.
Aliceon : 2005년작 <사계>와 같은 작품을 보면, 작가의 삶을 통해 느껴지는 감성이 ‘영상, 그래픽, 사진, 수묵화’ 등의 다양한 표현 방법과 압축된 ‘시(詩)’로 드러나는 듯 합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문인화에서 보여졌던 ‘시(詩) ․ 서(書) ․ 화(畵)’를 영상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에 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됩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동양화는 시(詩)입니다. 나의 작업은 詩를 짓고 그 시를 글씨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러한 시와 글씨가 水墨그림이 되고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영상이 되는 것이죠.
Aliceon :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시다 보면, 기존 동양화 작업들과 다른 새로운 고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들인가요?
= Wisdom of Art P.255 ~ 256
톰블리의 작품에는 글쓰기와 회화를 혼합할 때 자주 기대고 있는 동양화와 어떤 유사성이 있다. (톰블리: 서양에서 동양을 본다.) (홍지윤: 동양에서 서양을 본다.)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지필묵을 재료로 한다는 양식적 특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문인화의 개념에는 문학에서 말해져온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을 그린다는
상외지상(象外之象, 형상 밖의 표상 - 언제나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허의 상은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드러나게 된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켜 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부하며 생동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외지상(上外之象)이라고 하였다) 이라는 말에 의미를 둡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동양화가 단지 재료로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게는 정신성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이러한 동양화의 특성이 강한 제 작품을 가지고 기술적 변형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매체로써 동양화(지필묵)과 사진, 그래픽, 영상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써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둘의 성격을 한 선상위에서 이해하고 비교, 검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적이미지와 시각이미지, 무거움과 가벼움, 비움과 욕심, 수렴과 발산, 느림과 빠름,
종적사고와 횡적 사고, 모호함과 정확함,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이제는 제게 있어서 삶을 유추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문제들은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 믿음위에서 해결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민들이 단지작업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Aliceon : ‘디자인 정글 아카데미’ 에서 진행하시는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수업은 어떠한 수업인가요? 짧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어린아이같이 그리는 그림을 디자이너와 비전공자들에게 가르치는 수업입니다. 동양화와 동양화 이외의 각 장르가 가진 틀을 깨고 동서양의 문화를
넘나들며 동양인에게나 서양인에게나 친근한 동양화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세상은 변하고 당연히 동양화도 변합니다. 머물러있지 않고 변화를 꿈꾼다는 것은 일견
예술이란 말을 앞세운 창작의 본질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변화하는 지금의 패러다임은 환경과 생태 그리고 문화와 문화가 만나 만들어내는 또 다른 모습의 다양한 어떤 것에 대한 도전이자 그것에 대한 기대이며 발생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그 어떤 재료보다도 자연에 가까운 지필묵으로 인간과 자연을
이야기하기에 더 없이 알맞은 동양화가 구체적인 현재의 삶을 문인화와 선종화의 표현방법이 기반으로 하여 진행됩니다. 또한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동양화적 전통을 계승한다거나 그것의 현대화를 모색한다기보다는 디자이너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원하는 것에 대한 가장 원활하고 효과적인 아이디어와 창작을 위한 즐거운 재료가 되어 그 자체로 새로운 하나의 문화가 되기를 추구합니다.
http://ejungle.co.kr/workshop/wks_overview.asp?p_no=1866&pm_no=834
http://ejungle.co.kr/workshop/wks_overview.asp?p_no=1822
3. 작업노트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음유, 낭만, 환상 -
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2007 발췌
= The Wisdom of Art P. 260 -262 / P. 264~265
문화의 어떤 형식 / 톰블리의 효과 = “지중해”
2007 “吟 遊 浪 漫 幻 想”
원효로(元曉路)와 청파동(靑坡洞)에서 낭만적인 시를 지어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자연과 삶의 철학적인 단초를
수묵동양화(水墨東洋畵)의 전통인 지, 필, 묵(紙, 筆, 墨)과 시, 서, 화(詩, 書, 畵) 그리고 서화일체(書畵一體)의 개념을 기반으로 텍스트와 회화, 그래픽과 영상으로 재현한다.
또한 현재진행의 시간성위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열려있는 동양화와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동양화의 새로운 형태를 실험하고 영역을 확장 해 보고자 한다.
1. 음유吟遊
나는 시를 짓는 일이 좋다.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짙푸른 하늘을 보면 가끔 맑은 정신이 들어서 똑똑하고 청명한 시를 짓고 여행을 가서는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가슴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사랑을 하다가 마음이 아프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비극적인 시를 짓는다.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노랫말을 내 방식대로 지어보기도 한다.
나와 그 누군가에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즐겁다.
2. 낭만浪漫
그렇게 지은 시를 가지고 글씨를 쓴다.
나에게 글씨는 어렸을 때에 긴 연필심을 뾰족하게 갈아서 매일 일기를 쓰던 기억에서 부터이다. 사춘기와 청춘에는 색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린 편지지에 긴 편지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냈었고 좀 시간이 지나 지필묵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화선지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먹이 번지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내손을 빌어 글씨를 쓰는 것 같이 예측하지 않았던 형상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 신비로웠다.
그리고 또 나는 나와는 다르게 머리가 좋은 컴퓨터가 신기하고 재미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도 난 참 좋다.
클래식을 들으면 유럽의 우아한 귀족부인이 된 것 같고 재즈를 들으면 뉴욕밤거리의 여가수나 남미의 정열적인 여인이 된 것 같고 국악을 들으면 멋진 선비가 된 것도 같다.
그래서 시와 글씨와 그림과 음악들을 컴퓨터에 넣어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기도 한다.
이제는 시를 짓고 지필묵으로 글씨를 쓰고 떠오르는 인상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맛있게 생긴 갖가지 잡곡을 골라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잘 씻어서 적당한 양의 물을 넣어 알맞은 온도에서 끓여 정성스레 밥을 만들어 먹는 일처럼 일상이 되었다.
3. 환상幻想
작년 여름이 끝날 때쯤에 한참을 지내던 홍대근처에서 우리 동네로 작업실을 옮겨왔다.
우리 집은 원효로(元曉路 :새벽처럼 가장 밝은 길),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15분가량을 걸으면 청파동(靑坡洞 :푸른 고개가 있는 동네)이다.
이곳에 온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건물 4층이 작업실이다.
태어나고 자라온 이 두 동네의 이름이 유독 나는 마음에 들고 모두가 이웃사촌인 오래된 우리 동네가 어머니의 자궁 속이 그랬을 것처럼 편안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느꼈다.
마음속에 지나가는 잔잔한 바람과 흔들리는 물결과 눈부신 꽃과 나부끼는 나뭇잎을
그 전보다 훨씬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지나온 시간들과 지금과 내일에 대한 생각이 잦아졌다.
다른 게 아니라 그저 나를 둘러싼 지나간 그리운 것들,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들, 그리고 보고 싶고, 되고 싶은 것들......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vision)이든.
그러나 대신 틱낫한 스님의 말씀처럼 나의 에너지가 내주변의 잔잔한 바람과 흔들리는 물결과 눈부신 꽃과 나부끼는 나뭇잎과 또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주위의 사람들과 사실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평화롭고도 편안한 믿음과 함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현실의 바깥에서 더 자유로운 나는
그전보다 더, 그런 것들을 가슴속에서부터 떠오르는 대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본시 우리의 삶과 현실은 헛되고 헛될 뿐.
다만 미혹한 것들이 잠시 요술을 부려 살아가는 잠시 동안 덤덤한 허깨비를 보게 할 뿐.
갑자기 봄날이 온 것 같았던 따스하던 며칠 전에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아름다운 철죽이 이천 원이요, 이천 원이요” 하던 꽃장수 아저씨에게
뛰듯이 달려 나가 사온 푸르기만 하던 철죽 화분 두개에 오늘 분홍 꽃이 활짝 피었다.
정말 환상적이다.
2007년 3월25일 청파동에서 홍지윤,
4. 전시서문
성윤진,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음유, 낭만, 환상 -
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2007
환.상.변.주.곡.
운율을 담다.
음악과 시를 좋아하는 그녀의 청파동 작업실에는 노래와 시상詩想이 그치질 않는다. 그녀 특유의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기질에서 비롯된 시적 감흥은 붓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발상의 시초가 되어 우울과 즐거움, 슬픔과 기쁨을 적어내린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이 된다.
홍지윤의 작업은 시상詩想 에서 출발한다. 그의 글은 순수한 외면적 사물, 인간활동에 대한 과장된 묘사도 아니며 내면적 영혼, 사변, 철학에 대한 추구도 아니다. 현실적 인간세계에 대한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인식과 느낌이고 동경과 집착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풍성하고 젊은 정열과 상상이 스며들어 있다. 설사 낙심, 우울, 슬픔에 대해 묘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역시 젊음, 자유, 기쁨의 기운이 약동하고 있다. 그 기운은 글과, 글을 담은 글씨와, 글씨를 벗한 그림을 통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렇게 작품은 운율韻律을 담는다.
상충相衝의 미학
문자와 그림의 조합은 2005년 개인전 《사계》와 지난 2006년 독일 뮌헨시청갤러리에서 열렸던 《친구 넷 - 사군자》전시에서 그래픽을 이용, 문자와 그림을 오버랩하며 구체적으로 영상화되기 시작한다. ‘문자(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의미를 지닌 문자)’가 작품 안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된 이번 전시는 시, 서, 화詩書畵 일치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또 다른 방향’이란, 그의 작업이 동양화의 기본이 되는 지, 필, 묵紙筆墨과 시,서,화를 적절히 따르면서도 표현방식으로는 다양한 매체, 즉 형광안료와 천, 라이트박스 등을 혼용하고, 내용은 문학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은유와 함축의 상징성을 사용함으로써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이중적 작풍을 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얼개처럼 짜여진 구조는 한 매체나 기조가 다른 것에 흡수되는 형국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함으로써 퇴진출신(退陣出新_낡은 것을 사라지게하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함)의 국면을 본능적으로 시도한다.
작가는 대표적 표현기법들의 대치를 통해 내용을 극대화하는데, 각 기법과 내용은 팽팽한 긴장의 연상선상에서 균형을 잡는다. 즉 글씨와 색, 내용과 이미지를 대치시키거나 매체의 적극적인 활용이 바로 그것이다. 화려한 색동바탕에 먹으로 써 내린 <환상적인 무지개>, <환상적인 세상> 등 환상시리즈나 <좋을 好>,<무지개에게>와 같은 작품은 강렬한 색과 그에 버금가는 문자의 강제성이 충돌하며 증폭된 효과를 만든다. 문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들에게 ‘읽히는’ 강제성을 지닌다. 때문에 문자를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한 시도다. 글자의 강제성으로 인해 여타의 시각적 요소들을 일순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위험요소를 형광의, 발광하는 색동과 대치시킴으로써 양 측에 균형을 부여한다.
이러한 위험은 내용과 이미지 사이에도 일어나는데, 사군자四君子의 소재인 국화나 만개한 꽃, 새의 고전적 이미지를 사용함과 동시에 강렬한 노랑과 분홍, 주황의 형광안료와 가장 극적으로 대치되는 검은 먹을 끌어들임으로써 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서쪽하늘의 들국화>나 <꽃 속에 꽃이 핀다>처럼 자칫 이미지를 삼켜버릴 수 있는 텍스트의 강렬한 아우라를 그에 대응하는 형광색동과 만개한 꽃 이미지를 병치시킴으로써 무게중심을 잡은 것이다. 또한 문자를 흘려 씀으로써 가독성(可讀性)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마치 문양처럼 처리한 것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가져온다.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전통의 굴레를 타파해 나가되, 씨실과 날실의 조화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은 다층적 층위의 교묘한 장치들을 통해서 동양과 서양을 혼재하되, 매체의 혼합만이 아닌, 이미 그 구분이 모호해진 사상과 화풍의 혼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묵을 바탕으로 음각처럼 그림과 글씨의 윤곽을 파나간 <용서>, <불꽃나무>, <슬픔이여 떠나라> 등은 보다 전통적 동양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수묵을 주조主潮로 작가자신을 형상화한 여인이나 매화, 새를 등장시킨 것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이여 떠나라’는 브라질 전통가요의 구절을 새기거나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 또는 일견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손을 뻗어 용서를 구하는, 혹은 베푸는 여인의 모습은 수묵이라는 재료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일순간 깨뜨리며, 그 이상을 누린다.
홍지윤의 작업은 이렇듯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문화적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환상은 어디에
작가는 환상을 시공간과 대유하며 순차적 정의를 내린다.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 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 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 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 vision)이든.
(홍지윤, 작업노트 중에서, 2007)
이번 전시의 모태가 된 ‘환상’의 인상은 익숙한 일상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감정들을 구체화 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터무니없지만, 즐거운 상상의 나래는 작가적 상상으로 발전하여 앞서 언급한 다양한 매체와 내용으로 작품에 발현된다. 따뜻한 홍차를 약속한 그녀의 초대(홍지윤의 詩, <초대> 中)를 따라 원효로와 청파동의 골목인상을 반갑게 맞이할 일이다.
서양인에게도 낮선
동양인에게도 낮선
그 간극에서.
초대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날
오후 3시 즈음에 이리로 오세요.
뿌연 겨울 해가 따뜻하고요.
그 해가 보이는 창가에는 조용한 새들이 가끔 날아가요.
그리고
바흐의 아리오조를 첼로독주로 들으면요
그 어떤 여행지보다
그 어떤 천국보다
더 천국 같거든요.
바닥엔 너무 깨끗하지 않게 먼지 몇 개 찬찬히 얹혀 져 있고요.
새로 단 표백하지 않은 베이지 빛 광목 커튼이
찬 겨울바람도 막아준답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가
좀 겨를이 나면
따뜻한 홍차도 끓여 드릴께요.
당신이 꼭 이 곳에 왔으면 좋겠어요.
5. 비평
오광수, 월간아트인컬쳐 2005 4월호-FOCUS 한국화의 다양한 매체실험
......수묵과 그래픽영상이란 도대체 어떤 관계를 지닐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물음에 앞서 그의 실험은 경쾌한 진행을 보여주고 이와 같은 의문을 부단히 불식시키는 매력이 있다. "나의 수묵 애니매이션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따뜻하게 손을 잡은 모습"이란 작가의 말처럼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 ...... 그가 하고 있는 기본은 전통적인 수묵이다. 단지 이를 다시 영상으로 프로그래밍화 하였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전통적인 동양화가 지금에 있어서 어떠한 방법으로 재해석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라고 자신의 실험에 대한 정의를 이끌어 낸다...(중략)..... 홍지윤 의 수묵과 영상매체를 결합시켰다는 것은 일견 기발한 착상이 될 수 있고 수묵화의 존재방식에 대한 나름의 제안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_
임종은, 2007월간미술 6월호 Special feature - 감각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신세대 작가 (전통을 넘어선 새로움 움직임)
.........문인화적 모색은 홍지윤의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그만의 조형적 시각과 다양한 재료의 혼용으로 시, 서, 화 일치를 시도한다.
시, 서, 화와 지필묵의 전통이 등장하고 미디어(영상/그래픽)를 통해 때때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부분적으로 칼리그래프(서예)가 타이포그라프의 형식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사이에서 글씨와 그림이 흘러간다. 여기로 그린 그림처럼 자유로운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 서예나 시의 요소가 홍지윤의 회화에서는 필요하다. 이는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라거나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비약적 논리가 아니라 작가가 할 수 있는 익숙하고 즐거운 작업의 특색이고 특징이라고 홍지윤은 말한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행위를 통해 문인적 취미와 작가적 의식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그의 그림에 보이는 화려한 형광 색은 전통적인 오방색 이라기보다는 텔레비전 화면조절용 컬러배열처럼 보이며 전통화화의 시간적 측면은 영상적업을 통해 친밀하게보여 지고 있다. ...........
3. 결론
Cy Twombly는 서양에서 동양을 보았다.
그의 예술은 흔적 /억제 / 무기력한 태도/ 흔들리는 얼룩/ 습관의 조합, 배열, 분포
내던짐 / 희박함Rare / 간격 /미로 / 고전 / 지중해 / 비어 있는 진리 / 서투름
어색함 / 도(道) / 흔적들의 분산 / 우둔함 / 산재 등의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의 단어의 의미들은 기존의 서양 작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회화적 성공에 대한 부정적 의미이지만 그는 결국 성공을 이루었다.
그의 그림은 또한 그림문자처럼 기능하며 의미의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지며 미로의 기능을 가진다. 이는 매우 지적이며 매우 감각적인 희귀한 방식이다.
그리고 톰블리의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직관적이다. ‘효과’는 시에 의해서 암시되는 일반적인 인상, 육감적이며 가장 시각적인 인상이다. 그것은 인상(메세지)의 깨어지지 않는 통일성과 그것의 원인들이나 요소들의 복합성이라는 역설에 의해 정의된 감각의 진정한 범주이다.
톰블리의 예술은 폭력의 예술이상으로 동요의 예술이며, 그리고 동요는 폭력보다도 더 전복적인 경우가 많다. 바로 그것이 행동과 사고에 대한 어떤 동양적 양상의 교훈인 것이다. 또한 그의 예술은 역설적이며, 그 안의 간결함이 장엄하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간결한 것은 압축된 것처럼 보인다. 희박성은 밀도를 낳고 , 밀도는 수수께끼를 낳는다. 톰블리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발전이 일어난다.
확실히 침묵,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매우 아련한 그 표면의 지글거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적극적인 힘이다.
톰블리의 예술은 그 어떤 것도 포착하지 않는다. 그는 미묘하게 손을 움직이는 욕망과
매혹적인 야망을 신중히 거부하는 정중함 사이에서 위치하며 부유하고 표류한다.
만일 우리가 이같은 윤리를 정착시키기를 원한다면 아주 멀리 회화의 바깥, 서양의 바깥, 역사의 바깥에서, 의미의 한계 자체에서만 오직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톰블리의 윤리, 그의 위대한 역사적 독특함이 있다.
롤랑바르트가 톰블리의 작품에서 동양을 말하듯 본인의 작업에서도 서양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작품과 내면은 동양의 것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연필과 서양재료로써 표현된다. 이는 재료의 제한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태생적으로 그는 서양인이다. 마찬가지로 본인의 작업 또한 서구적인 미디어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지만 작업의 주체인 본인은 동양인이다. 다원주의 시회에서 이제 미술은 국적과 지역을 넘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작가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사고체계의 기반은 삶의 방식과 그것이 비롯된 문화와 유리될 수 없다. 이 말은 표현기법과 재료와 사고방식의 자유로
Roland barthes의 ‘The Wisdom of Art’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글
2. 본론
1) Cy Twombly 작품의 개요
2) Roland barthes의 ‘예술의 지혜 The Wisdom of Art’
3) 본인작품의 개요
4)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홍지윤의 사유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
3. 결론
1. 들어가는 글
Cy Twombly의 작품의 특징은 모호함과 산재함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그림과 글씨 낙서등으로 표현되어지는 그의 작품에는 여타의
서양 작가와는 구별되는 빈 공간과 공들여 그리지 않아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서정성이
엿보인다. 본인은 서양의 고전에 나타나는 일화와 신화의 인물들, 예술가,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따뜻한 풍광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작품세계에서 화가로써의 낙관적 태도와 한 인간으로써의 밝고 긍적적인 삶의 태도를 짐작하게 되었다.
후기 구조주의 이론가인 Roland barthes의 ‘The Wisdom of Art’는 롤랑바르트가 1979년 휘트니미술관 <사이 톰블리전>에 부친 글이다. 그림과 글씨와 낙서가 특징을 이루는 그의 작품의 의미와 그의 작품에 존재하는 동양적 내면의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연히 그은 것처럼 여기 저기 긁히고 얼룩졌으며 더럽혀진 것같이 보이는 톰블리의 그림에서 동양적인 비어있음의 공간을 발견하고 이를 선과 결부시킨다.
바르트는 톰블리의 그림을 통해서 서양의 바깥으로서의 동양에서 새로운 회화의 윤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목이 말하는 그대로 그것은 톰블리 예술의 특징임과 동시에 예술의 지혜로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인은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이 글에서 서양인인 Cy Twombly의 작업에 나타난 동양적 사고체계에 집중한다.
‘퓨전동양화’가 키워드인 본인 작업의 특징은 동양화의 근간을 이루는 詩, 書, 畵의 개념과 書畵一體의 개념을 지필묵과 형광안료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본인작업의 분명한 특성을 이루는 동서고금의 문화와 예술, 일상적 삶에 대한 시적 체험에서 비롯된 일상의 습관적인 詩作은 그림과 글씨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긴장감이 개입된 충돌과 화해가 존재하며 ‘상충의 미학’을 기반으로 하며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양화를 연구하는 본인의 작업에 개입된 삶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은 기본적으로
동양적 사유체계에 기점을 두며 이제 더 이상 동서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다원화된 현재의 시점에 있어서 동서양의 혼합된 사고체계 안에 자리한다.
이것으로 본인의 동양화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갖는다.
본인은 Cy Twombly와 본인의 작업에서 막연하게나마 양자 간의 어떤 관계를 느낀다.
이 글에서는 그 막연함에서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를 전재로 하고
작품의 시각적 표현과 내적 사고 그리고 작가적 태도에 대한 Cy Twombly와 본인 작업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먼저 Cy Twombly의 개요를 적고 Roland barthes의 ‘The Wisdom of Art’를 발췌, 요약하여 Cy Twombly의 작품세계와 동양적 사고체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후 본인의 시와 글씨 그리고 그림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에 대한 개요와
작품을 소개하고 Cy Twombly의 작품세계와의 관계성을 짐작하게 하는
본인의 인터뷰 글 (미디어 아트 채널 엘리스 온 www.Aliceon.net / 홍지윤, 새로운 동양화 존재방식을 제안한다_interview 2008.05.14 )과 2007년 개인전을 위한 작업노트와 전시서문(성윤진, ‘음유 낭만 환상-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비평을 첨부하여 본인작업의 특징과 작업에 나타나는 사고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하겠다.
결론에서는 Cy Twombly와 본인의 작업에 있어서의 관계를 유추해 보도록 하고
예술의 지혜에 대해 서술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본인작품에 존재하는 동양적 사고의 흐름을 한편의 시를 통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본인의 작업 안에 내재한 모호함이 가능성의 힘으로 환원되기를 바라며 또한 예술의 지혜로움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라며.
2. 본론
1) Cy Twombly 작품의 개요
사이 톰블리 (Cy Twombly, 1928.4.25~)는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이다.
특유의 선묘와 상징적인 기호들, 서투른 글자체와 숫자 등이 어우러진 그림과 낙서, 드로잉을 장난스럽게 결합하는 매체들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독창적인 양식을 선보이며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나타낸다. 또한 때로는 휘갈겨 쓴 서체의 흔적들로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연상시키며 폭발할 듯한 강한 에너지를 화면에 담아 강렬하고 색다른 시각적, 예술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유럽 지중해의 오래된 건축과 신화의 이미지를 특유의 선묘와 상징적인 기호로 풀어낸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직관적이다.
Cy Twombly는 1928년 미국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태어났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보스톤 미술관학교와 뉴욕의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1951년 동료인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권고로 블랙마운틴대학에 입학하여 1952년까지 공부하였다.
그곳에서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과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벤 샨(Ben Shahn)에게 사사했으며 음악 감독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기도 했다.
폴 클레(Paul Klee)와 클라인경향의 작품으로 1951년 뉴욕 쿠츠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버지니아 미술관의 지원을 받아 북아프리카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였고 1959년 이탈리아 로마로 이주하여 로마에서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로마를 근거지로 삼고 뉴욕 화단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술 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196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4년 후 밀워키 아트센터 주최로 첫 번째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후 유수의 미술관에서 작품 전시가 있었다.
한편 1995년에는 텍사스 휴스턴 메닐 컬렉션 내에 사이 톰블리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디자인한 이 컬렉션에는 1953년부터 1994년 사이에 제작된 회화, 조각, 드로잉, 기타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톰블리는 현재 렉싱턴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살고 있다.
2) Roland barthes의 ‘예술의 지혜 The Wisdom of Art’
기호학과 시각예술 / 김융희, 양은희 옮김 / 시각과 언어 출판사 / 1985 발췌
P.252-P.253
Ι .
톰블리는 재료(연필자국, 오일, 종이, 캔버스 ...)를
목적을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영광 속에서 발현된 절대적인 소재로 강요한다.
톰블리의 재료는 연금술사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제1질료 materia prima이다.
제1질료는 의미에 의해 이루어지는 분할이전에 존재한다.
톰블리의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보게 해 주는 데 있다.
물질을 펼쳐놓은 것이 아니라 흔적을 남겨놓게 하는 비밀을 지닌 예술이다.
연필의 특성을 표현하기위해 재료의 압력을 억제함으로써 그리고 종이위에 연필가루가 약간 흩뿌려지도록 거의 무기력한 태도를 취하게 함으로써 “좋은 것은 가볍다”라고 했던 니체의 명제를 확인시킨다.
재료가 하나의 사실pragma로 나타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위해 톰블리는 기법이 아니라 적어도 습관을 가졌다.
톰블리의 독창적인 예술을 만들어주는 것은 습관의 조합, 배열, 분포이다.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지만 톰블리의 문장은 모방될 수 없는 것이다.
- 톰블리의 회화적 요소 (덧붙이는 방법 via de porre)
1) 긁기 scratching.
2) 얼룩만들기 smuding 얼룩보다는반점 macula
3) 더러움 - 그 자국들을 원치 않아서 지우려 하는 듯이 다른 자국들로 뒤덮는 것 같다.
망쳐 지워버리려 하는 체 한다. 그리고 지워 없앤 것을 다시 망친다.
두 차례에 걸친 실패는 일종의 팔랭프세스트palimpseste
: 씌여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거듭 다시 쓴 것. 를 생산한다.
그것은 가벼운 구름이 서로 상쇄되지 않고 하나가 다른 하나 앞을 지나가는 하늘과 같은
깊이를 캔버스에 부여한다.
P.254
어떤 재료를 사실로 정립하려는 이러한 제스쳐들은 더러운 어떤 것을 만드는 일과 결부되어있다. 그 본질을 설명 해 주는 것은 더럽고 방치된 것에서이다.
사물의 진리는 폐물에서 가장 잘 읽혀진다.
붉은 색의 진리는 얼룩 속에서이며 연필의 진리는 불안정한 선속에서 이다.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이데아’는 개념적으로 엄격하게 규제된 번쩍이는 형상이 아니라
어슴프레한 바탕에 희미하게 흔들리는 얼룩들이다.
+또 다른 사건
글로 쓰여진 사건들인 ‘이름들’
타이포그라피와는 다른 유치하고 불규칙한 서투른 것
메카니즘의 순수성
ex) 비르길리우스 / 이탈리아인들 : 유추
발레리에게 / 타틀린느에게 : 캔버스는 부재하며 준다는 행위만 남는다.
그리고 최소한의 글쓰기만이 남는다.
P.255 ~ 256
Ⅱ.
그리스어로 '티케 Tyche' 는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을 뜻한다.
톰블리의 캔버스는 항상 어떤 우연에서 비롯되는 어떤 힘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우연의 효과이거나, 좀 더 정밀하게 말한다면 영감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영감이란 우연의 행복과 같은 창조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움직임과 하나의 효과가 이같은 효과를 설명한다.
1.‘내던져진 것 jete'과 같은 인상
물질이 캔버스 복판에 내던져진 것처럼 보이는데 내던짐이란
최초의 결정과 최후의 우유부단함이 동시에 담겨진 행위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내던질 때 , 나는 하는 행위에 대해서 알고 있으나,
그것이 말들어낼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톰블이의 방식은 우아하고 유연하며 ‘긴’것이다.
2.분산의 외양
이는 내던짐의 결과와 같다.
톰블리의 캔버스위에는 요소들이 여백에 의해서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작품에서 글쓰기와 회화를 혼합할 때 자주 기대고 있는 동양화와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여백은 단지 조형성만을 가지고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호흡을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미묘한 에너지와 같다.
철학자 바슐라르 - 나는 공중에서 부유하며 공중에서 호흡한다. ((퐁텐블로의 학교))
내던짐과 분산에 연결된 상태는 희박함Rare 이다.
비어있는 공간과 우연 tyche 이라는 관념 은 어떻게 관계하는 것 일까 ?
(발레리의 강연 : 콜레주 드 프랑스 College de France의강연 1944년5월5일)
1.작품은 정해진 계획에 응한다.
2.예술가는 상상의 사각형을 메꾼다.
: 톰블리는 희박함의 원칙 즉 공간의 원칙에 따라 사각형을 채워나간다.
일본미학 - 간격에 대한 미묘한 범주를 알고 있다.(‘마’門 )
마=라틴어의 Rarus=톰블리의 예술
희박한 사각형은 두 가지 문명을 가리킨다.
1. 서예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동양예술의 ‘비어있음’
2. 톰블리의 공간인 지중해적 구도
톰블리의 그림은 정신이 가득 채우려는, 사라지고 있는 요소들rari과 함께 있는 무덥고 빛나는 지중해풍의 대저택인 것이다. (발레리)
P.257
Ⅲ.
<마르스와 예술가> Mars and the Artist
collage of oil, charcoal, and crayon on paper.
Alessandro Twombly collection
<마르스와 예술가> Mars and the Artist 는 형상적인 요소와 철자적인 요소가 결합된 그림문자처럼 기능한다.
톰블리의 작품 중 유일하게 형상화와 의미작용이 결합된 문제를 설명 해 준다.
추상화: 의미의 문제 - 회화 앞에서 그것이 재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것
톰블리의 표제: 의미의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진다.
미로의 기능을 가진다. 매우 지적이며 매우 감각적인 희귀한 방식을 따르는 에술이며 그 희귀한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험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고 불리는 신비주의 학파들의 방식으로 부정성의 체험을 계속하게 한다.
톰블리의 효과: 고답파에서 상징주의로 이어지는 19세기의말의 프랑스 문학유파가 사용했던 매우 엄밀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톰블리의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
‘효과’는 시에 의해서 암시되는 일반적인 인상, 육감적이며 가장 시각적인 인상이다.
이 효과의 특성은 그 일반성이 실제로는 절대 분해 될 수 없으며 국소화된 세부사항의 부가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효과란 수사학적인 속임수가 아니다.
그것은 인상(메세지)의 깨어지지 않는 통일성과 그것의 원인들이나 요소들의
복합성이라는 역설에 의해 정의된 감각의 진정한 범주이다.
P. 260 -262
문화의 어떤 형식
1. 톰블리의 문화는 고전적인 것이다.
그리스나 라틴문학에서 전이된 신화적인 사실들에 직접적으로 의거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회화속에 삽입하고 있는 ‘작가들’은 휴머니즘시인들(발레리, 키이츠)이거나 고대로부터 자양분을 받아 성장한 화가들(푸생, 라파엘로)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환기되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그리스 신들로부터 현대적인 예술가로 이어진다.
그 연결고리는 오비드와 푸생이다.
고대인들과 시인들 화가들을 결합시킨다.
시인 발레리에게의 헌정
- 화가의 그림과 시인의시 한편이 동일한 제목 ‘비너스의 탄생’을 갖고 있다.
두 작품은 해안선에서의 출현이라는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톰블리의 효과‘에 열쇠를 제공한다.
2. 톰블리의 효과 = “지중해”는 추억과 감각의 거대한 복합체
톰블리의 그림에 나타나는 언어들(그리스어와 라틴어)은 역사적이고 신화적이고 시적인 문화와 / 땅위의 풍경과 / 바다 해면과의 접경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태와 / 색과 빛의 총체적 삶을 말한다.
3. 톰블리의 집
나폴리만에 있는 프로시다 섬
:빛, 하늘, 땅, 바위와 아치의 곡선 바로 그것이 비르길리우스이고 또한 톰블리의 그림이다. -톰블리의 그림에서 하늘과 바다의 공허함, 매우 가벼운 지상의 흔적 (보트 ,곶)하늘의 푸르름 , 바다의 쟂빛, 새벽빛의 핑크색을 찾을 수없는 그림은 하나도 없다.
P. 262
Ⅳ.
톰블리의 그림속에 나타난 지중해적 효과
A .
톰블이의 효과들은 거만한 품위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톰블리 그림의 놀라움apodeston , 엉뚱함 , 조롱, 수축, 장엄함의 파괴, 서투르게.
희박한 사각형 , Rarus, 문(門)
톰블리의 그림에서 선(禪)의정신을 재발견한다.
이성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연구되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경험이 실재로 존재한다.
그것 이 깨달음이다. = 계시 illumination, 각성 awakening,
불교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심적인 충격일 것이다.
모든 종류의 형식이나 인과관계와 단절된 비어 있는 진리
B . 선의 깨달음
: 비이성적이며 우리의 종교적인 체험과 결부된 진지함에 도전하는 부조화스런 놀라운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톰블리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무례함, 충동, 미세한 깨달음
c . 캔버스에 나타난 글쓰기
문자기호를 쓸 때마다 그림의 자연스러움의 충격과 동요가 있다.
1. 눈금, 숫자, 작은 산술 기호 등 회화의 권위 있는 비실용성과 계산의 실용적인 기호
사이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
2. 그림
3. 끊임없이 반복되는 손의 ‘서투름’
톰블리에게 있어서 문자는 장식문자나 인쇄문자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세련되지 않은 글씨
톰블리는 문자요소를 사용함으로써 거의 언제나 자기 자신의 그림에 모순을 도입한다.
‘희박함’에 더해진 ‘서투름’, ‘어색함’은 고전적 문화에서 발견되는 경향을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마치 그림이 문화와 싸우고 있었던 것처럼, 과정된 담론을 집어던지고 아름다움만을 보유한다.
톰블리의 예술은 폭력의 예술이상으로 동요의 예술이며, 그리고 동요는 폭력보다도 더 전복적인 경우가 많다.
바로 그것이 행동과 사고에 대한 어떤 동양적 양상의 교훈인 것이다.
P.264~265
Ⅴ.
그리스어로 드라마drama는 어원적으로 ‘행하다’라는 개념과 결부 되어있다.
드라마란 행하여지는 것인 동시에 캔버스 위에서 현인의 것을 가지고 상연되는 것을 의미한다. 톰블리의 작품 속에서 두 가지의 행위, 혹은 두 가지 무대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행위를 본다.
1. 첫 번째 유형의 행위는 일종의 문화적 재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 고전적인 문화의 유형
ex. 바쿠스제의 5일, 비너스의 탄생...역사적 행위들은 이름에 의해 환기된다.
고전적인 회화에서는 ‘발생하고 있는 것’이 회화의 주제인데 톰블리의 주제는 ‘일화적인 것’이다.
톰블리에게 있어 주제는 개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고전적인’ 텍스트이다.
그것은 기묘한 개념이며, 욕망의 대상, 사랑의 대상, 어쩌면 향수의 대상이기 때문에
참되다.
2. 두번째 유형의 행위 : 주제와 대상
프랑스어에는 어휘상 유용한 애매성이있다.
‘주제sujet'가 때로는 작품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산출하는 인간존재가 있는데
그 인간존재는 거기서 말하여진 것의 암묵적 저자로 형상화된다.
톰블리에게 있어서 ‘주제’는 물론 그림이 말하고 있다.
1. 주제-대상은 글로 쓰여진 암시일 뿐이다.
2. 주제는 톰블리 자신이다.
3. 그림의 주제는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인 당신과 내가 된다.
그림을 바라보는 주체들이 다양하다는 것과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 앞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담론의 유형이
주체의 유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P.266~268
톰블리의 작품을 바라보는 주체들
1. 문화의 주체
2. 전문성의 주체
3. 즐거움의 주체
4. 기억의 주체
5. 생산의 주체 - 같은 것을 하고 싶다는 욕망
그는 지나치게 원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한다.
그는 도(道)의 성애적 예술과 관련된 방식으로 성공한다.
강렬한 쾌락은 억제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둔함에 대한 끊임없는 승리
: 필획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 - 화가를 독특하게 하는 것
‘내던져짐’의 인상 , 흔적들의 분산
: 의도된 방향이 있는 것 같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어떤 방향이 부여되어 있다.
톰블리의 열쇠 - Rarus '산재'
그의 예술은 역설적이며, 그 안의 간결함이 장엄하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간결한 것은 압축된 것처럼 보인다. 희박성은 밀도를 낳고 , 밀도는 수수께끼를 낳는다. 톰블리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발전이 일어난다. 확실히 침묵,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매우 아련한 그 표면의 지글거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적극적인 힘이다.
도가 말하기를 “존재는 가능성을 부여하며 , 우리가 그 가능성들을 사용하는 것은
그 비-존재를 통해서이다. ”
톰블리의 예술은 그 어떤 것도 포착하지 않는다. 그는 미묘하게 손을 움직이는 욕망과
매혹적인 야망을 신중히 거부하는 정중함 사이에서 위치하며 부유하고 표류한다.
만일 우리가 이 같은 윤리를 정착시키기를 원한다면
아주 멀리 회화의 바깥, 서양의 바깥, 역사의 바깥에서 , 의미의 한계 자체에서만 오직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톰블리의 윤리, 그의 위대한 역사적 독특함이 있다.
= 모호함 그리고 힘
도덕경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무것도 빌리지 않고서도 만들어 내며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서도 행동하며
자신의 작품이 완성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작품은 남을 것이다.
3)본인 작품의 개요
작업의 개념
.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된다.
나의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변화(變化)'란 서양의 '변화(change)'와는 다르다. 변(變)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현상만을 말한다면 화(化)에는 근원의 변화 또는 아이덴티티의 변화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근원적 변화로 아이덴티티를 창츨하는 행위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고인古人의 가능성을 몸에 익히면서도 그것이 아닌 아이덴티티의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는 유기적 생성 그리고 고법古法에 구애됨 없이 자기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는
개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石濤 畵論>에서는 이와 함께 고 古 /경 經/권 權의 개념을 화'化'와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는데 '경'과 '권'이란 곧 영원한 변화를 나타내는 말로 예술 행위에 있어서 결여될 수 없는 두 개의 축,즉 원칙과 상황의 적절한 넘나듦에 대한 의미로 경과 권에 대한 논리는 법'法'과 화'化'의 의미로 대체된다.
2.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따뜻한 만남: 시(詩)+수묵(水墨)+영상 "
나의 그림에는 화려한 슬픔과 철학적 낭만이 있다. 나의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된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한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4)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
“홍지윤의 사유(思惟) – 움직이는 水墨그림과 詩
1. 동양화는 시(詩)이다.
본인작업에 있어서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한다.
작업은 자연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생각으로 詩를 짓고 글씨를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것이 水墨그림이 되고 때로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현대성,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되어 수묵영상이 된다.
이는 紙, 筆, 墨과 詩, 書, 畫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으로 전개된다.
수묵은 물과 먹에 의한 단순함과 자유로움, 자연스러운 다양함을 특징이며 정신이다. “홍지윤의 사유 - 움직이는 수묵그림과 시”라는 작업의 명제는 여기서 비롯되어 이를 담아내고자 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양화의 전통과 수묵화의 기법 그리고 형광안료를 사용하는 등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와 현대의 정서와의 만남을 통해
회화, 그래픽이미지, 영상, 설치 등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젊고 생기발랄하게 해석한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동양화가 동양화의 전통과 현대 산업사회의 다양한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 방식을 제안하여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한다.
2. 미디어 아트 채널 엘리스 온 www.Aliceon.net / 홍지윤, 새로운 동양화 존재방식을 제안한다_interview 2008.05.14 Aliceon0804 interview q&a sheet _ 홍지윤 발췌
Aliceon :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3월에 진행되었던 11회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홍지윤 작가는 ‘퓨전 동양화’ 작가로 알려져 왔습니다. 본인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 ‘퓨전 동양화’에 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추구하는 퓨전동양화는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화와 디지털의 만남을 기점으로 하여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제 작업은 현재진행형의 동양화를 추구하며 이는 동시대 미술을 이야기 합니다. 제 스스로의 작업이 지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편안하게 다가가서 함께 나누고 서로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Aliceon : (위 질문에 이어서) 개인 홈페이지에서 “동양화와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동양화의 존재방식을 제안한다”라고 언급을 하셨는데, 동양화의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서의 영상 매체와의 결합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동양의 사유 체계는 우주와 자연과 삶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연속체인 우주 안에서 자연과 창조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죠.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대한 관심은 표현의 자유로움에 대한 단초가 됩니다. 제 작업은 자유로움에 대한 정신적이고 또한 물리적인 사유의 공간적 재현입니다. 동양화의 수묵과 영상과의 만남은 이러한 수묵 동양화의 전통과 영상매체의 결합이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제 작업은 시와 글씨가 기반이 되는 수묵화를 탐구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의 기술과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Aliceon : 예전 한 매체(2008 아트프라이스 1월호 - Artist Forum)와의 인터뷰에서 ‘작품과 작가의 삶이 일치하는가?’ 라는 질문에, ‘삶과 일치 한다. 삶을 詩로 적고 그것을 작품화 하는 것이 내 작업의 내용이기 때문이다’라고 답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삶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영상 매체가 지닌 특성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가요?
= The Wisdom of Art P.255 ~ 256
일본미학 - 간격에 대한 미묘한 범주를 알고 있다. (‘마’門 )
저는 오래전부터 그날의 삶을 하루하루 짧은 일기나 혹은 단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감성을 통해 정리되거나 혹은 그대로 풀어져서 한편, 한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어들을 정리하고 바라보면서 시가 가지게 되는 자체의 운율과 글씨자체가 가지고 있는 조형성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글과 글씨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았다가 늘어놓았다가 하며 또 다른 형태를 상상합니다. 이것들은 다시 이미지가 되어 편집프로그램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시간성‘이라는 개념을 빠뜨릴 수 없는데 이는 또한 동양화의 지필묵이 가지는 매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양한 농담을 담은 먹물은 단지 눈으로 보기에는 검은 먹물로만 보입니다. 이것이 시간을 거치면서 물이 증발하고 남은 후 각기 다른 농담으로 화선지위에서 본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시간을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 원래의 색을 보여주는 수묵의 특성은 삶의 과정과 닮아있다고 여겨졌고 특별히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묵그림이 컴퓨터 프로그램 안에서 편집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며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도 한 맥락위에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묵작업의 과정과 삶의 과정의 문제 그리고 수묵작업을 컴퓨터를 통해 매체화하는 데에 있어서 당연히 존재하는 시간성은 최근 이야기 하고 있는 제 감수성에 대한 ’기록‘의 문제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기도 합니다.
감성을 시간성위에서 시각화 하는 데에 있어서 영상매체는 제게 있어서 수묵작업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흥미로웠고 작업의 경쾌한 진행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작업의 특징을 말 할 때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며 제 작업에 있어서 영상 매체가 갖는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Aliceon : 홍지윤 작가의 작업을 보면, 한편의 영상 편지를 보는 듯 합니다. 일전의 언급을 보면, '나에게 움직이는 수묵그림-수묵영상은 시간의 흐름을 동양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하셨는데,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란 어떠한 의미인가요?
위의 답변과 연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저는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 또는 세월이지나면서 변화되어가는 사람들의 겉모습과 속마음, 그것들과 나와의 관계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어쩌면 제 작업이 이러한 부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성이 재빠르지 않고 단번에 무엇을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제 심성은 심사숙고하게 느린 속도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수묵화의 재료적 특성과 닮아있습니다. 이제는 원래의 내가 그런 것이었는지 동양화를 그려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겠지만요.
2003년 ‘화선지위의 시간’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본격적으로 수묵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1997경쯤부터 써온 편지나 일기 시 들을 엮어서 간간히 그려온 수묵드로잉들과 함께 엮어 만든 책입니다. 책의 제목을 지을 무렵 고심 끝에 책의 내용에 들어있는 시의 제목들을 죽 늘어놓고 보니 결국 지나가는 시간위에서 일어났던 또는 겪었던 감정들을 적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책을 출간한 이후 그러한 면에서의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고 본격적으로 수묵그림들과 시들을 영상에 담아보기로 하고 작업한 수묵영상 ‘가을날 저녁에’(2003)이 지금까지 수묵영상작업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수묵의 특성과 그것을 닮은 제 감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면 빨리 움직이는 세태나 여타의 영상작업의 속도보다 훨씬 느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성을 가진 영상작업의 디테일에 있어서 느린 디졸브로 이어지는 편집방식에서 느림의 정도를 조절하면서 느림 안에서 발생되는 빠르기와 또 다른 느림에 대한 생각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영상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림’으로 대체되는 동양적 사고와 동양화 내 삶의 방법을 수묵영상작업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간 흐름의 동양적 시각화' 라고 표현 해 본 것입니다.
Aliceon : 2005년작 <사계>와 같은 작품을 보면, 작가의 삶을 통해 느껴지는 감성이 ‘영상, 그래픽, 사진, 수묵화’ 등의 다양한 표현 방법과 압축된 ‘시(詩)’로 드러나는 듯 합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문인화에서 보여졌던 ‘시(詩) ․ 서(書) ․ 화(畵)’를 영상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에 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제 작업에서 시는 그림이 되고 또한 그림은 시가 됩니다. 생각을 해 보면, 그림은 또는 시는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삶에서 만난 우연한 어떤 때를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나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벼운 농담을 하듯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작업은 주로 자연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과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紙, 筆, 墨과 詩,書,畵 그리고 서화동원(書畵同源)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소통의 매개는 언어와 이미지이며 예술은 문학적인 네러티브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동양화는 시(詩)입니다. 나의 작업은 詩를 짓고 그 시를 글씨로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러한 시와 글씨가 水墨그림이 되고 컴퓨터에 옮겨져서 수묵영상이 되는 것이죠.
Aliceon :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하시다 보면, 기존 동양화 작업들과 다른 새로운 고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떠한 것들인가요?
= Wisdom of Art P.255 ~ 256
톰블리의 작품에는 글쓰기와 회화를 혼합할 때 자주 기대고 있는 동양화와 어떤 유사성이 있다. (톰블리: 서양에서 동양을 본다.) (홍지윤: 동양에서 서양을 본다.)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지필묵을 재료로 한다는 양식적 특징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문인화의 개념에는 문학에서 말해져온 보여지는 것 이외의 것을 그린다는
상외지상(象外之象, 형상 밖의 표상 - 언제나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허의 상은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드러나게 된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켜 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풍부하며 생동적인 그림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외지상(上外之象)이라고 하였다) 이라는 말에 의미를 둡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동양화가 단지 재료로써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게는 정신성을 요구하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때문에 처음에 이러한 동양화의 특성이 강한 제 작품을 가지고 기술적 변형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매체로써 동양화(지필묵)과 사진, 그래픽, 영상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써의 설득력과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둘의 성격을 한 선상위에서 이해하고 비교, 검토,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내적이미지와 시각이미지, 무거움과 가벼움, 비움과 욕심, 수렴과 발산, 느림과 빠름,
종적사고와 횡적 사고, 모호함과 정확함, 동양과 서양, 동양화와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은 이제는 제게 있어서 삶을 유추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의 문제들은 작가로써 뿐만이 아니라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 믿음위에서 해결되어왔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민들이 단지작업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길에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Aliceon : ‘디자인 정글 아카데미’ 에서 진행하시는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수업은 어떠한 수업인가요? 짧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어린아이같이 그리는 그림을 디자이너와 비전공자들에게 가르치는 수업입니다. 동양화와 동양화 이외의 각 장르가 가진 틀을 깨고 동서양의 문화를
넘나들며 동양인에게나 서양인에게나 친근한 동양화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세상은 변하고 당연히 동양화도 변합니다. 머물러있지 않고 변화를 꿈꾼다는 것은 일견
예술이란 말을 앞세운 창작의 본질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변화하는 지금의 패러다임은 환경과 생태 그리고 문화와 문화가 만나 만들어내는 또 다른 모습의 다양한 어떤 것에 대한 도전이자 그것에 대한 기대이며 발생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그 어떤 재료보다도 자연에 가까운 지필묵으로 인간과 자연을
이야기하기에 더 없이 알맞은 동양화가 구체적인 현재의 삶을 문인화와 선종화의 표현방법이 기반으로 하여 진행됩니다. 또한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동양화적 전통을 계승한다거나 그것의 현대화를 모색한다기보다는 디자이너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원하는 것에 대한 가장 원활하고 효과적인 아이디어와 창작을 위한 즐거운 재료가 되어 그 자체로 새로운 하나의 문화가 되기를 추구합니다.
http://ejungle.co.kr/workshop/wks_overview.asp?p_no=1866&pm_no=834
http://ejungle.co.kr/workshop/wks_overview.asp?p_no=1822
3. 작업노트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음유, 낭만, 환상 -
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2007 발췌
= The Wisdom of Art P. 260 -262 / P. 264~265
문화의 어떤 형식 / 톰블리의 효과 = “지중해”
2007 “吟 遊 浪 漫 幻 想”
원효로(元曉路)와 청파동(靑坡洞)에서 낭만적인 시를 지어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는 자연과 삶의 철학적인 단초를
수묵동양화(水墨東洋畵)의 전통인 지, 필, 묵(紙, 筆, 墨)과 시, 서, 화(詩, 書, 畵) 그리고 서화일체(書畵一體)의 개념을 기반으로 텍스트와 회화, 그래픽과 영상으로 재현한다.
또한 현재진행의 시간성위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열려있는 동양화와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동양화의 새로운 형태를 실험하고 영역을 확장 해 보고자 한다.
1. 음유吟遊
나는 시를 짓는 일이 좋다.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짙푸른 하늘을 보면 가끔 맑은 정신이 들어서 똑똑하고 청명한 시를 짓고 여행을 가서는 아름다운 경치 앞에서 가슴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사랑을 하다가 마음이 아프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비극적인 시를 짓는다.
그리고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노랫말을 내 방식대로 지어보기도 한다.
나와 그 누군가에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즐겁다.
2. 낭만浪漫
그렇게 지은 시를 가지고 글씨를 쓴다.
나에게 글씨는 어렸을 때에 긴 연필심을 뾰족하게 갈아서 매일 일기를 쓰던 기억에서 부터이다. 사춘기와 청춘에는 색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린 편지지에 긴 편지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냈었고 좀 시간이 지나 지필묵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화선지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먹이 번지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내손을 빌어 글씨를 쓰는 것 같이 예측하지 않았던 형상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 신비로웠다.
그리고 또 나는 나와는 다르게 머리가 좋은 컴퓨터가 신기하고 재미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도 난 참 좋다.
클래식을 들으면 유럽의 우아한 귀족부인이 된 것 같고 재즈를 들으면 뉴욕밤거리의 여가수나 남미의 정열적인 여인이 된 것 같고 국악을 들으면 멋진 선비가 된 것도 같다.
그래서 시와 글씨와 그림과 음악들을 컴퓨터에 넣어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기도 한다.
이제는 시를 짓고 지필묵으로 글씨를 쓰고 떠오르는 인상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맛있게 생긴 갖가지 잡곡을 골라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잘 씻어서 적당한 양의 물을 넣어 알맞은 온도에서 끓여 정성스레 밥을 만들어 먹는 일처럼 일상이 되었다.
3. 환상幻想
작년 여름이 끝날 때쯤에 한참을 지내던 홍대근처에서 우리 동네로 작업실을 옮겨왔다.
우리 집은 원효로(元曉路 :새벽처럼 가장 밝은 길),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15분가량을 걸으면 청파동(靑坡洞 :푸른 고개가 있는 동네)이다.
이곳에 온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건물 4층이 작업실이다.
태어나고 자라온 이 두 동네의 이름이 유독 나는 마음에 들고 모두가 이웃사촌인 오래된 우리 동네가 어머니의 자궁 속이 그랬을 것처럼 편안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느꼈다.
마음속에 지나가는 잔잔한 바람과 흔들리는 물결과 눈부신 꽃과 나부끼는 나뭇잎을
그 전보다 훨씬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지나온 시간들과 지금과 내일에 대한 생각이 잦아졌다.
다른 게 아니라 그저 나를 둘러싼 지나간 그리운 것들,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들, 그리고 보고 싶고, 되고 싶은 것들......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vision)이든.
그러나 대신 틱낫한 스님의 말씀처럼 나의 에너지가 내주변의 잔잔한 바람과 흔들리는 물결과 눈부신 꽃과 나부끼는 나뭇잎과 또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주위의 사람들과 사실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평화롭고도 편안한 믿음과 함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현실의 바깥에서 더 자유로운 나는
그전보다 더, 그런 것들을 가슴속에서부터 떠오르는 대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
본시 우리의 삶과 현실은 헛되고 헛될 뿐.
다만 미혹한 것들이 잠시 요술을 부려 살아가는 잠시 동안 덤덤한 허깨비를 보게 할 뿐.
갑자기 봄날이 온 것 같았던 따스하던 며칠 전에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아름다운 철죽이 이천 원이요, 이천 원이요” 하던 꽃장수 아저씨에게
뛰듯이 달려 나가 사온 푸르기만 하던 철죽 화분 두개에 오늘 분홍 꽃이 활짝 피었다.
정말 환상적이다.
2007년 3월25일 청파동에서 홍지윤,
4. 전시서문
성윤진,
홍지윤의 퓨전동양화: 음유, 낭만, 환상 -
원효로와 청파동에서 낭만적인 시를 짓고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다. 2007
환.상.변.주.곡.
운율을 담다.
음악과 시를 좋아하는 그녀의 청파동 작업실에는 노래와 시상詩想이 그치질 않는다. 그녀 특유의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기질에서 비롯된 시적 감흥은 붓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발상의 시초가 되어 우울과 즐거움, 슬픔과 기쁨을 적어내린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이 된다.
홍지윤의 작업은 시상詩想 에서 출발한다. 그의 글은 순수한 외면적 사물, 인간활동에 대한 과장된 묘사도 아니며 내면적 영혼, 사변, 철학에 대한 추구도 아니다. 현실적 인간세계에 대한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인식과 느낌이고 동경과 집착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풍성하고 젊은 정열과 상상이 스며들어 있다. 설사 낙심, 우울, 슬픔에 대해 묘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역시 젊음, 자유, 기쁨의 기운이 약동하고 있다. 그 기운은 글과, 글을 담은 글씨와, 글씨를 벗한 그림을 통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렇게 작품은 운율韻律을 담는다.
상충相衝의 미학
문자와 그림의 조합은 2005년 개인전 《사계》와 지난 2006년 독일 뮌헨시청갤러리에서 열렸던 《친구 넷 - 사군자》전시에서 그래픽을 이용, 문자와 그림을 오버랩하며 구체적으로 영상화되기 시작한다. ‘문자(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의미를 지닌 문자)’가 작품 안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된 이번 전시는 시, 서, 화詩書畵 일치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또 다른 방향’이란, 그의 작업이 동양화의 기본이 되는 지, 필, 묵紙筆墨과 시,서,화를 적절히 따르면서도 표현방식으로는 다양한 매체, 즉 형광안료와 천, 라이트박스 등을 혼용하고, 내용은 문학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은유와 함축의 상징성을 사용함으로써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이중적 작풍을 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얼개처럼 짜여진 구조는 한 매체나 기조가 다른 것에 흡수되는 형국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함으로써 퇴진출신(退陣出新_낡은 것을 사라지게하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함)의 국면을 본능적으로 시도한다.
작가는 대표적 표현기법들의 대치를 통해 내용을 극대화하는데, 각 기법과 내용은 팽팽한 긴장의 연상선상에서 균형을 잡는다. 즉 글씨와 색, 내용과 이미지를 대치시키거나 매체의 적극적인 활용이 바로 그것이다. 화려한 색동바탕에 먹으로 써 내린 <환상적인 무지개>, <환상적인 세상> 등 환상시리즈나 <좋을 好>,<무지개에게>와 같은 작품은 강렬한 색과 그에 버금가는 문자의 강제성이 충돌하며 증폭된 효과를 만든다. 문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들에게 ‘읽히는’ 강제성을 지닌다. 때문에 문자를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한 시도다. 글자의 강제성으로 인해 여타의 시각적 요소들을 일순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위험요소를 형광의, 발광하는 색동과 대치시킴으로써 양 측에 균형을 부여한다.
이러한 위험은 내용과 이미지 사이에도 일어나는데, 사군자四君子의 소재인 국화나 만개한 꽃, 새의 고전적 이미지를 사용함과 동시에 강렬한 노랑과 분홍, 주황의 형광안료와 가장 극적으로 대치되는 검은 먹을 끌어들임으로써 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서쪽하늘의 들국화>나 <꽃 속에 꽃이 핀다>처럼 자칫 이미지를 삼켜버릴 수 있는 텍스트의 강렬한 아우라를 그에 대응하는 형광색동과 만개한 꽃 이미지를 병치시킴으로써 무게중심을 잡은 것이다. 또한 문자를 흘려 씀으로써 가독성(可讀性)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마치 문양처럼 처리한 것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가져온다.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전통의 굴레를 타파해 나가되, 씨실과 날실의 조화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은 다층적 층위의 교묘한 장치들을 통해서 동양과 서양을 혼재하되, 매체의 혼합만이 아닌, 이미 그 구분이 모호해진 사상과 화풍의 혼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묵을 바탕으로 음각처럼 그림과 글씨의 윤곽을 파나간 <용서>, <불꽃나무>, <슬픔이여 떠나라> 등은 보다 전통적 동양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수묵을 주조主潮로 작가자신을 형상화한 여인이나 매화, 새를 등장시킨 것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이여 떠나라’는 브라질 전통가요의 구절을 새기거나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 또는 일견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손을 뻗어 용서를 구하는, 혹은 베푸는 여인의 모습은 수묵이라는 재료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일순간 깨뜨리며, 그 이상을 누린다.
홍지윤의 작업은 이렇듯 텍스트와 이미지가 상충한다. 또한 먹과 현대의 안료가 상충한다. 종이와 미디어 역시 충돌한다. 이 다층적인 충돌은 작업 전면의 적절한 장치와 구조를 통해 해결되고 화해함으로써 홍지윤의 퓨전동양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문화적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환상은 어디에
작가는 환상을 시공간과 대유하며 순차적 정의를 내린다.
그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환상(喚想, illusion)이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환상(幻像, phantom)이든,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환상(幻想, fantasy)이든, 실체도 없이 허망하고 덧없는 내일의 환상(幻相, vision)이든.
(홍지윤, 작업노트 중에서, 2007)
이번 전시의 모태가 된 ‘환상’의 인상은 익숙한 일상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감정들을 구체화 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터무니없지만, 즐거운 상상의 나래는 작가적 상상으로 발전하여 앞서 언급한 다양한 매체와 내용으로 작품에 발현된다. 따뜻한 홍차를 약속한 그녀의 초대(홍지윤의 詩, <초대> 中)를 따라 원효로와 청파동의 골목인상을 반갑게 맞이할 일이다.
서양인에게도 낮선
동양인에게도 낮선
그 간극에서.
초대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날
오후 3시 즈음에 이리로 오세요.
뿌연 겨울 해가 따뜻하고요.
그 해가 보이는 창가에는 조용한 새들이 가끔 날아가요.
그리고
바흐의 아리오조를 첼로독주로 들으면요
그 어떤 여행지보다
그 어떤 천국보다
더 천국 같거든요.
바닥엔 너무 깨끗하지 않게 먼지 몇 개 찬찬히 얹혀 져 있고요.
새로 단 표백하지 않은 베이지 빛 광목 커튼이
찬 겨울바람도 막아준답니다.
편안한 의자에 앉았다가
좀 겨를이 나면
따뜻한 홍차도 끓여 드릴께요.
당신이 꼭 이 곳에 왔으면 좋겠어요.
5. 비평
오광수, 월간아트인컬쳐 2005 4월호-FOCUS 한국화의 다양한 매체실험
......수묵과 그래픽영상이란 도대체 어떤 관계를 지닐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물음에 앞서 그의 실험은 경쾌한 진행을 보여주고 이와 같은 의문을 부단히 불식시키는 매력이 있다. "나의 수묵 애니매이션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따뜻하게 손을 잡은 모습"이란 작가의 말처럼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 ...... 그가 하고 있는 기본은 전통적인 수묵이다. 단지 이를 다시 영상으로 프로그래밍화 하였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전통적인 동양화가 지금에 있어서 어떠한 방법으로 재해석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라고 자신의 실험에 대한 정의를 이끌어 낸다...(중략)..... 홍지윤 의 수묵과 영상매체를 결합시켰다는 것은 일견 기발한 착상이 될 수 있고 수묵화의 존재방식에 대한 나름의 제안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_
임종은, 2007월간미술 6월호 Special feature - 감각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신세대 작가 (전통을 넘어선 새로움 움직임)
.........문인화적 모색은 홍지윤의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그만의 조형적 시각과 다양한 재료의 혼용으로 시, 서, 화 일치를 시도한다.
시, 서, 화와 지필묵의 전통이 등장하고 미디어(영상/그래픽)를 통해 때때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부분적으로 칼리그래프(서예)가 타이포그라프의 형식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사이에서 글씨와 그림이 흘러간다. 여기로 그린 그림처럼 자유로운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 서예나 시의 요소가 홍지윤의 회화에서는 필요하다. 이는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라거나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비약적 논리가 아니라 작가가 할 수 있는 익숙하고 즐거운 작업의 특색이고 특징이라고 홍지윤은 말한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행위를 통해 문인적 취미와 작가적 의식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그의 그림에 보이는 화려한 형광 색은 전통적인 오방색 이라기보다는 텔레비전 화면조절용 컬러배열처럼 보이며 전통화화의 시간적 측면은 영상적업을 통해 친밀하게보여 지고 있다. ...........
3. 결론
Cy Twombly는 서양에서 동양을 보았다.
그의 예술은 흔적 /억제 / 무기력한 태도/ 흔들리는 얼룩/ 습관의 조합, 배열, 분포
내던짐 / 희박함Rare / 간격 /미로 / 고전 / 지중해 / 비어 있는 진리 / 서투름
어색함 / 도(道) / 흔적들의 분산 / 우둔함 / 산재 등의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의 단어의 의미들은 기존의 서양 작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회화적 성공에 대한 부정적 의미이지만 그는 결국 성공을 이루었다.
그의 그림은 또한 그림문자처럼 기능하며 의미의 갈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지며 미로의 기능을 가진다. 이는 매우 지적이며 매우 감각적인 희귀한 방식이다.
그리고 톰블리의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직관적이다. ‘효과’는 시에 의해서 암시되는 일반적인 인상, 육감적이며 가장 시각적인 인상이다. 그것은 인상(메세지)의 깨어지지 않는 통일성과 그것의 원인들이나 요소들의 복합성이라는 역설에 의해 정의된 감각의 진정한 범주이다.
톰블리의 예술은 폭력의 예술이상으로 동요의 예술이며, 그리고 동요는 폭력보다도 더 전복적인 경우가 많다. 바로 그것이 행동과 사고에 대한 어떤 동양적 양상의 교훈인 것이다. 또한 그의 예술은 역설적이며, 그 안의 간결함이 장엄하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간결한 것은 압축된 것처럼 보인다. 희박성은 밀도를 낳고 , 밀도는 수수께끼를 낳는다. 톰블리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발전이 일어난다.
확실히 침묵,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매우 아련한 그 표면의 지글거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적극적인 힘이다.
톰블리의 예술은 그 어떤 것도 포착하지 않는다. 그는 미묘하게 손을 움직이는 욕망과
매혹적인 야망을 신중히 거부하는 정중함 사이에서 위치하며 부유하고 표류한다.
만일 우리가 이같은 윤리를 정착시키기를 원한다면 아주 멀리 회화의 바깥, 서양의 바깥, 역사의 바깥에서, 의미의 한계 자체에서만 오직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톰블리의 윤리, 그의 위대한 역사적 독특함이 있다.
롤랑바르트가 톰블리의 작품에서 동양을 말하듯 본인의 작업에서도 서양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작품과 내면은 동양의 것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연필과 서양재료로써 표현된다. 이는 재료의 제한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태생적으로 그는 서양인이다. 마찬가지로 본인의 작업 또한 서구적인 미디어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지만 작업의 주체인 본인은 동양인이다. 다원주의 시회에서 이제 미술은 국적과 지역을 넘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작가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사고체계의 기반은 삶의 방식과 그것이 비롯된 문화와 유리될 수 없다. 이 말은 표현기법과 재료와 사고방식의 자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