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윤 전
꽃, 구름 (FLOWER, CLOUD·花, 雲)
2019.12.21(SAT) – 2020.02.22(SAT)
관람시간 Open 10:00-19:00
장소 Venue 서드뮤지엄 3rd Museum
부대행사 Event 홍지윤 쇼
Hong Ji-Yoon Show(poetry reading, artist talk)
2020.01.10(FRI) 18:00-20:00
매주 월요일, 국경일 휴관
Closed on mondays and national holidays
무료 관람
Free admission
기획의 글
홍지윤 ‘전, 꽃. 구름’_花云_Flower, Clouds.
(다중의 시공간) 동시대화 된 흐름으로서의 동양화, 한국화의 감각적 다채로움과 화려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홍지윤 작가는 그동안 다양한 매체, 장르, 영역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열정 가득한 작업들을 통해 삶의 기운과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업들을 펼쳐왔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세계를 각별하게 조명할 이번 전시는 우리 문화예술의 근본 바탕에 뿌리를 두되 미래를 꿈꾸는 현재의 공간으로서의 서드 뮤지엄의 뜻과 방향성을 고스란히 전할 것이다. 다기한 감각들의 향연과도 같은 작가 작업처럼 이번 전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유동적인 공존은 물론 다매체, 다중감각, 공공공간으로서 복합적인 소통과 교감이 펼쳐질 수 있는 시공간성을 담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상외지상의 전시) 하지만 이번 전시는 단지 이러한 작업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면모들 못지않게 세상과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고민, 성찰의 면모들 역시 의미 있는 무게감으로 주목하고자 했다. 작가 작업의 이면, 혹은 내면에 대한 접근을 통해 작가의 세상을 둘러싼 다채로운 사유, 감각의 이유들을 다시금 읽어갈 수 있는 그런 전시로 꾸며보고자 한 것이다. 작가 역시 이를 ‘상외지상象外之象’이라 하여 보여 지는 것의 뒤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의 이야기와 형상을 각별히 중시해왔다. 겉으로 드러난 작업은 물론 그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것들, 혹은 작가적인 것들 역시 우리가 전시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작가 자신에 다름 아닐, 또 다른 작가와의 만남을 위해 작가의 주요 작업들은 물론 이전의 원형적인 작업들을 두루 살피고 어루만지고자 한다.
(꽃, 너머의 꽃) 화려하고 다채로운 꽃들은 작가의 대표적 이미지이자 개념, 또 다른 분신이다. 작가도 그렇겠지만 그 누구에게나 꽃은 기본적으로 가장 찬란한 생의 아름다움, 순간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본다면 꽃은 간단치 않은, 역설적인 삶의 의미와 이치 또한 함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생명의 치열함으로 질곡의 삶을 견디고 이겨낸 기쁨의 순간인 동시에 또 다른 생으로 거듭날 수 있는 순환의 신비롭고 성스러운 의미, 그리고 그 이면의 유한한 삶을 다시 돌이켜보게 만드는 덧없음으로 우리를 다시금 돌이켜 보게 하기 때문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아스라이 사라지려 하지만 또 다른 절점으로 거듭나는,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자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인해 작가의 꽃들이 더욱 강렬한 화사함으로 빛났을지도 모르겠다. 찬란한 슬픔만큼이나 짙고 짙은 생(명)의 긍정적인 욕망을 향한 화려한 단단함과 그 밀도를 못내 전하기 때문이다. 꽃이야 말로 그 강렬함 만큼이나 생의 모호한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존재일 것이다.
(내밀한 존재론)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터, 순간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위해 아슬아슬한 삶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꽃의 내밀한 존재론이야 말로 작가가 선택한, 단순하지 않았던 꽃의 복합적인 의미인 동시에 작가적인 삶, 혹은 긴장으로 대면해왔던 세상과도 연동된다. 특히나 겨울에 진행될 이번 전시는 이러한 역설적인 희망의 의미가 더욱 강화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말처럼, ‘한 겨울이 되어도 굳게 얼어붙은 심연에서조차 쉬지 않고 봄을 꿈꾸었던, 한없이 물기어린 꽃 뿌리는(삭제) 하나’이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도 이러한 꽃의 이면을 인식하지 않은 채 무지하게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가벼운 시각과 거리를 두어 왔다. 작가에게 있어 꽃은 그저 아름다움만이 아닌, 덧없는 생의 존재, 시공간에 대한 깨달음의 회환이면서도 이를 힘겹게 극복하고자 했던 생에 대한 긍정과 낙관의 지표, 자국들과도 같은 것들이다. 결국 작가의 꽃은 세상의 다중적인 의미가 상충하는 자취이자 흔적들이며 이 혼돈스러운 세상과 갈등하지만 다시 화해, 융합해온 다중적인,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비록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 아름다움을 위해 끊임없이 주변과 균열, 긴장을 거듭하여 다시 리드미컬한 어울림으로 공존, 공생하는 어떤 깨달음 같은 것들 말이다. 혹은 그 덧없음과 허망함으로 인해 무수히 꿈꾸며 되풀이했었던 환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꽃, 구름) 색, 광, 경으로 빛났던 서드 뮤지엄이 이번 전시에서는 ‘꽃, 구름’으로 뭉게뭉게 피어나도록 할 것이다. 보이는 것들은 물론 그 너머의 단순하지 않은 작가, 작업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를 위해 구름의 의미를 더했다. 저 하늘 사이로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은 우러러보게 만들기에 지극히 높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금세 사라지기에 허망한 것들로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쉽게 사라지는 것들만이 아닌 자유자재로 유동하며 움직이는 면모들로 인해 가변적이고 비정형적인 의미 또한 함축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태양 빛과 수없이 충돌하며 때로는 다채로운 빛, 색으로 노을 지고 때로는 어두운 이면을 드리우게 하는 애매모호한 불투명성을 더하기도 한다. 화려함과 덧없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명백한 아름다움을 뜻하는 긍정적인 의미가 강한 꽃 개념에 이러한 구름의 다층적인 의미를 더하여 이번 전시의 개념적 의미를 증폭하고자 한 것이다. 화려한 꽃의 이미지에 잿빛 구름의 가변적이고 깊이 있는 의미를 연동시킨 것인데 이번 전시가 좀처럼 닿을 수 없는, 작가, 작업의 내면 혹은 근원적이고 본질적 것들과 대면할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내 긴 그림자가 머무는 곳) 단순한 화려함으로 그저 빛나는 것만이 아니라 구름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불투명하게 드리워 그늘지게 함으로서 그 이면의 것들을 부각하고자 한 것이다. 그늘이 된다는 것은 사물의 뒷면을 살펴보게 하는 그림자처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 이면의 것들, 희미하지만 분명한 자취, 흔적들을 온 감각들로 마주한다는 것과 상통한다. 미처 밝힐 수 없었던, 이미지, 텍스트 너머의 작가 혹은 작업의 바탕, 그 긴 그림자들이 머무는 속내들을 은근하게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시서화가 능한 작가였지만 그 숱한 글로도 글씨로도 그림으로도 온전히 닿을 수 없었던, 혹은 그토록 부단히 닿으려 했던 삶, 세상의 어떤 역설적인 비의들을 향해서 말이다.
(화이불화) 그렇게 이번 전시는 작가 작업의 다채롭고 화려한 면모는 물론 그 내면의 것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면을 보는 힘으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꽃, 구름, 그림자, 그늘, 사이, 겹의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공존하여 긴장과 떨림으로 감각적인 울림을 자아낼 수 있는 전시이고자 했기 기 때문이다. 꽃과 구름, 꽃과 그림자, 꽃과 그늘처럼 논리적으로 형용모순일지라도 우리 내 복잡다단한 인생의 비의적인 역설처럼 작가의 작업들을 다각적인 시선으로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작업이 전하는 화사한 꽃들의 밝은 면들은 물론 그 내면의 어두운 것들 또한 살펴보고 어루만짐으로써 음양이나 율려(律呂)처럼 서로 다른 것들이 이질적으로 공존하는, 그 다채로운 차이의 감각이 함께 하는 것들을 통해, 결국은 우리를 둘러싼 삶, 생에 다름 아닌 것들을 성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작가 작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꽃이지만 그런 꽃만은 아니며(花而不花), 화려하지만 단지 눈에 보이는 떠들썩한 화려함만이 아닌 내면의 근본적인 것들을 성찰하게 하는 조용한 화려함이며(華而不華), 조화롭지만 불협화음의 화음처럼 모순과 긴장을 공존시키는 이질적인 조화이지 않을까 싶다(和而不和).
(다성적인 불협화음의 화음) 이렇듯 작가의 작업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세상에 대한 고민과 긴장들로 엮어낸 묘한 반전의 매력이 숨어 있다. 이는 작가, 작업이 전통 동양의 사유, 감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동서고금은 물론 아날로그, 디지털 등의 세상의 숱한 변화, 움직임들을 길항시키고 포용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서로 다른, 이질적이고 모순된 것들을 단순한 (정반)합의 논리로 융합, 통일시킨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치열한, 혹은 내적인 긴장들로 상충, 화해를 반복하면서 생생한 긴장의 감각들로 혼성(混成)시켜 왔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작가는 이들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자리하는 간극, 겹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꽃 한 송이 꽃처럼, 그리고 수없이 서로 다른 꽃들이 모여 이룬,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꽃무리처럼, 그 다채롭고 풍부한 삶의 고민, 사유, 감각들이 토해내는 다성적인 불협화음의 화음들, 그 어울림일 수 있지 않았나싶다.
(수많은 겹이 새롭게 하나가 되는) 그렇게 작가는 그동안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고급예술과 대중문화, 추상과 구상, 물질과 정신, 내부와 외부, 삶과 죽음, 유한과 무한의 이항대립적인 상충들은 물론, 전통의 오방색과 디지털이미지로 구현한 형광컬러, 서예로 구현된 한글, 한자, 영문 글씨와 타이포그라피, 전통 동양화와 디자인, 영상미디어, 팝아트적 해석들을 나란히 병치 혹은 이접(disjunction)시켜 왔다. 작가를 지칭하는 퓨전 동양화 작가로서의 면모들이다. 하지만 이는 비단 형식적 기법상의 이질적 공존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그 각각의 차이, 균열, 모순들을 포용하여 이를 자유재재로 혼융하려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안팎은 물론 그 너머의 것들을 향해, 서로 섞이지 않는 것들을 부단히 섞어, 낯설고 팽팽한 접점과 불화의 긴장된 떨림, 울림들을 엮어내어 강렬한 삶의 기운들을 전해왔다. 꽃이라는 모순적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융합시키고 있는, 가장 친숙하고 화려한 형상, 의미들을 빌어서 말이다. ‘수많은 겹이 새롭게 하나가 되는 것이 예술세계의 근본’이라 말하는 작가에게 있어 꽃, 구름은 결국 작업의 내밀한 ‘것, 곳’들로부터 피워낸, 작가가 말하는 분홍색 거짓말이자 빛나는 이야기, 그 총화(總, 花/話/華)에 다름 아니지 않나 싶다.
(꽃이 구름으로, 구름이 꽃으로) 하지만 이번 전시가 깊고 무거운 개념들만은 전하지는 않는다. 꽃구름, 곧. 여러 빛깔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향기로운 구름(彩雲)의 밝고 화사한 느낌들 또한 전할 테니 말이다. 무채색의 구름이지만 아침, 저녁의 노을빛과 어우러져 화려한 색, 빛으로 물들여지는 꽃구름은 꽃과 함께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뜻하며, 동시에 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나 한창 만발한 흰 꽃들을 의미한다. 구름이자 꽃인 것이다.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꽃이 구름으로, 구름이 새로, 새가 사람으로, 사람이 사랑으로, 사람이 꿈으로, 시가 글씨로, 글씨가 그림으로, 그렇게 그림이 다시 꽃으로 구름으로 자유롭게 유동하는 작가에게 있어 ‘꽃, 구름’은 작가의 작업이 전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가변적인, 그 모든 것들에 다름 아니다. 특히나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구름의 가변적이고 다기한 비정형의 모습들은 동서고금, 디지털, 아날로그의 숱한 경계들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작가 작업의 다중, 다매체적인 측면들, 그리고 그러한 자유로운 아름다움의 노력들이 담고 있는 풍부한 의미들과 연결된다. 쉽게 규정하고 한정지을 수 없는 아름다움의 순간들로 뭉게뭉게 피어올라 숱한 변신들로 자유로운 작가 작업의 감각적인 형상들 말이다.
(꽃향에꽃향에취하여아득하니꽃구름속에쓸어지게하여라) 또한, 꽃구름의 의미는 그것이 비록 순간일지라도 영원성을 위해 자리할 수밖에 없는 꽃처럼, 꽃그늘 사이의 그윽한 향들에 취해 아득할 수 있는 감각적 움직임을 촉발케 한다. 그런 면에서 구름이 함축하는 ‘드리우다’의 동태적이고 정동적인 의미 또한 놓칠 수 없는 요소이다. 꽃구름 아래 편안히 쉬며, 소요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비록 힘들고 각박한 생일지라도 그 순간들만큼은 한가함과 여유로움으로 삶을 누릴 수 있는 이번 전시의 각별한 의미도 덧붙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구름의 촉각적이고 공감적인 느낌들과 연동되는 작가 작업의 생생한 감각, 사유들을 다각적으로 공감, 향유할 수 있는 그러한 의미들 말이다. 그렇게, 꽃으로 구름지게 하여 촉촉한 감각, 사유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느낌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잡힐 듯 말 듯, 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그 짙은 여운들이 깊게 자리하게 하는 작가, 작업의 감성적인 울림을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만치 물결치던 시간을 뒤돌아, 다시 내게로 잦아들다) 이러한 느낌들을 위해 이번 전시의 작품 배치 및 공간 동선도 각별히 배려했다. 가시적인 화려한 꽃의 이미지에서 좀처럼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가변성으로 유동하는 구름으로,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할 작가 본연의 것들로 향할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갖가지 색, 빛으로 화려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의 본원적인 것들, 그 자취, 흔적들 또한 담아낼 수 있는 전시의 전체 공간/시간성의 이미지를 만들고자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겉에서 속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다색에서 단색으로, 아크릴에서 수묵, 드로잉, 텍스트 등의 작가 내면의 것들로 점차 작가 작업의 뿌리, 모태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작가 작업의 다각적인 면, 근원적인 것들을 가능한 한 드러내고자 했다. 비록 그것들이 비정형의 가변성으로 유동하는 모호한 것들일지라도 이를 통해 통상적인 꽃의 이미지, 의미가 담고 있는 가시적인 화려함과 감각적 다채로움만이 아닌 그 이면의 속내들을 조금은 깊고 다르게 사유하고 체감토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얀 심연의 끝)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회고전은 아니지만 작가 작업의 오늘날을 돌이켜 사유해볼 수 있는 이전의 영상, 화첩, 드로잉, 텍스트 등 좀처럼 쉽게 볼 수 없었던 지난 시절의 작가의 모습을 가늠케 할 것들을 포함한 작가의 다양한 도큐먼트, 아카이브를 통해 다중적이고 다매체적인 시공간성이 공존하는 작가 작업의 이모저모를 생생하게 마주하도록 할 것이다. ‘하얀 심연의 끝, 바로 그 한 가운데서, 길고 더딘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작가가 말한 것들을 향해 말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작업의 화려함 자체는 공간 전체에 스며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깊숙한 내면으로의 스밈만큼이나 풍성한 외부로의 번짐 역시 이번 전시에서 배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니, 공간 전체를 꽃과 구름 사이에 놓이게 함으로써, 색과 형, 뜻, 그 모든 것들이 다성적으로 울릴 수 있는 각별한 장으로 화(花, 話, 畵, 華)하고자 한다.
(꽃, 기운, 구름, 뜻.)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은 없다’라는 잇사의 하이쿠가 전하는 것처럼 ‘전, 꽃, 구름.’으로 다가서는 이번 전시가 꽃이라는 생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전하는 기운, 활력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교감, 향유할 수 있는 장이자, 다시 구름으로 여유롭게 확장하여 작가 작업의 속 깊은 뜻들, 그 뿌리와 바탕 또한 살필 수 있는 자리가 됨으로써 작가에게는 물론 우리 모두의 본질적인 생의 이치와 삶의 의미들에 다름 아닐, 작가, 작업의 더 깊고 풍부한 의미들을 성찰해볼 수 있는 그런 각별한 자리이길 기대해본다. (민병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