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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빛나는 열정 :: 별빛, 달빛, 눈빛
나, 홍지윤
작업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나와 내 삶의 문제들로부터 태어난다.
이들은 아주 세세하게 연결된 그물 같아서 전후좌우 이음새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고 최근에 느낀 바로는 어렵게 구분을 했다 해도 내겐 별 의미가 없다. 심지어 처음과 마지막조차도. 내 모습이 수많은 이유로 변해왔어도 나는 나인 것처럼. 한 송이 꽃이 여러 겹의 꽃잎이 모여 피어나고 새의 몸이 셀 수 없이 많은 깃털로 이루어지며 이들이 순서를 다투어 이 세상에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나와 관련된 내 그물 – 내 꽃, 내 새들의 전체적인 모양새나 색깔, 냄새, 소리 같은 것들이 나조차도 비슷한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서 때때로 내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작업하는 이유, 나와 삶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가 이와 같다.
난 영화광이다. 영상작업에는 지난 기억들이 가라앉아 있다. 우러난 찻잔 속의 찻잎처럼.
사춘기 땐 AFKN과 ‘주말의 명화’에서 나오는 영화에 코를 박았고 여고생 땐 나만의 미장센을 이입해 가며 첫 회부터 종일 같은 영화에 빠졌다. 그리고 대학에 가선 거의 매일 노랑 파마머리에 꽃무늬 미니 원피스, 보라색 스타킹, 빨간 하이힐 차림으로 최루탄 터지는 광화문을 돌진해 유럽영화를 상영하는 프랑스문화원을 향했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카키(Khaki)색을 국방색(國防色)이라고 부르는 권위적이고 컴컴한 현실과 문화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었다.
삼십 대엔 하던 대로, 하라는 대로가 절대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미술적 저항을 했다. 형광색의 꽃으로. 그래야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이름도 지었다. 누가 뭐라던 <퓨전동양화>라고. 그리고 요즘은 ‘색동꽃’ <아시안퓨전>이다.
화려한 경계(Gorgeous Border) 스크린샷, 6분, Single channel video, 2012
화려한 경계
2012년 8월, 천혜의 자연과 서해 최북단 군사분계선이 공존하는 백령도 ‘사곶 사빈’에서 촬영한 작품 <어진 바다>, <화려한 경계>는 분단 한국, 나, 내 미술에서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다.
작품의 도상이 디자인 된 여성의 옷, 군복, 장지 그림을 넌 세 줄의 빨랫줄을 넘나들며 무용수가 장고춤을 춘다. 군복 천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그리고 유연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백령도의 파도. 마지막으로, 이들을 화첩에 적은 자작시와 글씨와 이를 상징하는 여러 색의 색동 꽃이 출연한다.
빛나는 열정(Brillant Passion), 평창동계올림픽기념 광화문 미디어 파사드상영 실황, 3분 15초, 2017
빛나는 열정 :: 별빛, 달빛, 눈빛
2016년 11월, 평창동계올림픽기념 광화문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 상영은 무산됐다. 한 달을 지낸 병원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이 무렵 나는 홍콩 개인전과 동시다발의 또 다른 프로젝트들을 준비하다가 번 아웃이 되어 있었고 광화문광장에서는 거의 매일 밤 분노의 촛불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작년 11월, 작품이 상영됐다. 최루탄 터지던 광화문을 뒤로하고 영화를 보기 위해 프랑스문화원에서 살다시피 했던 내가 30년 후 ‘빛이 되는 문 광화문(光化門)’에 내 영화를 그려 넣게 됐다니! 시(詩)를 명분으로 별빛(교감), 달빛(영감), 눈빛(직감)을 표어 삼아 사는 미술가인 나에게 찰나의 위안이었다. 그리고 동전의 양면이 필요 이상 너무나 명확한 독특한 내 삶과 한국에서 태어난 이상 나서서 정치를 하지 않아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내 존재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영상작품 <빛나는 열정>과 등장하는 꽃의 시기별 회화작품을 건 개인전 ‘별빛, 달빛, 눈빛’(에비뉴엘아트홀 2.1-2.25, 롯데갤러리 영등포점 2.28-3.25)이 오픈한지 오늘로 한 달 하고 5일이 되었다. 그간 북한이 참여한 평창동계올림픽이 치러졌고 오늘 방북단이 북한을 다녀왔다.
2018년 3월 6일. 홍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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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윤(1970- ) 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석사, 박사. 올해의 주목할 예술가상(2012), 서울문화재단기금 중진작가상(2014), 『Asian Fusion』(2014) 등 지음. 동양의 인문적 가치를 다중매체에 담아 시를 짓고 유희하듯 작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