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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2 Art Magazine--1

 

 

 

여정은 끝도 방향도 없다.

 

김영민(전시기획자)

 

1990년대를 사는 미국의 이란성 쌍둥이 남매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tv시트콤 <PLEASANT VILLE>로 들어가게 되는 영화가 있다. 마을 이름이 영화의 제목인데, 그 마을은 이름 그대로 쾌적하고 반듯하다. 그 마을은 온통 흑백으로 이루어져있고 사람들은 단정하고 기계적이고 그래서 질서정연하다. 감정이 없으니 고뇌도 없다. 일종의 유토피아 혹은 완벽한 세계에 대한 비유이다. 화장실엔 변기도 없고, 화재가 없으니 불도 없다. 당연히 불타는 키스도 키스에서 연쇄되는 섹스도 없다. 감정이 없으니 그에 따른 혼란도 없다. 그래서 색깔이 없는 흑백의 세상이다. 소묘는 있으되 채색은 없고, 당연히 형태는 있으되 색채는 없으며 고전주의는 있으되 낭만주의는 없다. 이 흑백의 마을사람들은 1990년대를 살던 아이들에 의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배우고, 자유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색을 얻는다. 장미꽃 한 송이로 시작하여 연인들 …나중에는 마을 전체가 총천연색이 된다. 그 와중에 색깔을 얻은 사람들에 대한 무채색 인간들의 억압, 공동체 성원의 갈등, 분노나 슬픔 등의 개별적인 감정들도 생겨난다. 인간의 감정은 질서정연한 유토피아를 허물고 그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색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나아가 색은 감정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여화를 보면서 했다. 그리고 뭔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

 

먹(水墨)과 작은 새

홍지윤의 장점은 자유로운 필선의 운용이다. 맺힌데 없는 붓질이 시원하다. 걸음마와 말 다음으로 배운 게 그림인 작가들 대부분이 가진 자유로운 손을 홍지윤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부터 그림을 ‘배운’ 작가들의 손은 종종 선입견을 만들기도 하지만, 홍지윤의 필선은 작가의 성격대로 활달하고 직설적이다. 요즈음 그의 그림을 보면, 작가의 기질이나 성정과 그림이 점점 닮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학교라든가 미술제도 그리고 화파(畫派)나 장르가 주는 부담을 벗어버린 듯하다.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부담은 그가 속한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것이지만, 그 의무의 부과는 개인이 공동체에 잠재적으로라도 얻을 게 있을 때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창작과 관련된 자유가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은 공동체와 작가간의 공모 혹은 절충의 결과이다. 이런 공모와 자기검열을 집단적 개성이라고 부르거나 시대정신이라고 부른다. 혹은 화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뭐라고 부르든 홍지윤은 자신의 기질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맘껏 ‘부담’없이 그려대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맘이 후련하다.

홍지윤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이 2003년 개인전 때였으니까, 벌써 십 수 년 전이다. 그 때 작업실도 몇 번 가보고 작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때 홍지윤은 잘 번져서 투명한 수묵 추상으로 정교하고 깊은 공간을 만드는 그림과 작은 화면에 작은 새들을 솜씨있게 그려 보이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남천선생의 제자답게 ‘수묵화 운동’의 수혜와 그늘 속에서 잘 다듬어지고 솜씨를 키워간 작가였다. 글과 글씨와 그림의 균형을 맞추어 간다는 동양의 화론에도 충실해 보였으며, -제법- 현대적인 의미의 추상성과 작가의 개별성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체제 내의 작가였다. 마구 그려대야 직성이 풀리는 활달한 기질보다는 체제가 주는 집단적 개성의 수혜와 개인적 변형이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었다. 수묵으로 그린 새들을 가지고 초보적인 에니메이션을 제작해서 보여준 것이 이채롭다면 이채로웠다고 할까? 간혹, 젊은 작가들에게서 학교 선생이 되는 것과 화업을 지속하는 것을 수렴하거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홍지윤의 경우도 그랬지 않았나 싶다. 그때, 추상의 수묵으로 한껏 깊은 공간을 만들고 그 위를 날아오르는 작은 새를 그린 작품이 있었다고 기억되는데 작가는 ‘그 새’에 자기 자신을 투영했다. 그가 그린 새들은 수묵의 공간을 나는 것이 아니라 수묵의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그린 새 역시 수묵이었고, 작가는 숙제하는 아이처럼 행복해 뵈지는 않았다.

 

2007년은 매우 이채롭고 짧은 호황이 정점에 달했던 해였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2007년 작가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분당에 대단위 단지의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거실 벽에 걸 그림들의 수요가 생겨났으며, 미술권력은 학교에서 시장으로 옮겨가는 듯 보였다. 어린 작가들이 속속 대형 화랑과 계약하고 옥션에서 기록을 갱신하기도 했다. 미술계의 연공서열과 권위는 허물어지고 돈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 했다.

홍지윤에게도 2007년은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슨…음식점도 아닌데, 퓨전동양화라고 자신의 그림에 ‘정체’를 부여하고 <음유낭만환상 吟遊浪漫幻像>이란 제목의 전시를 연다. 이 전시에서 홍지윤은 원색을 날것으로 마구 날리고 숨겨두었던 ‘개인’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슬픔이여 떠나라>같은 신파조의 제목을 달기 시작한다. 수묵의 새는 붉은 꽃을 만나고 2009년 중국 전시에서는 –마침내- 꽃잎처럼 색이 입혀지고 꽃과 새는 헤나처럼 여인의 몸을 장식한다. 그녀의 수묵도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all-over)으로 매화가 되고, 공간에는 그의 시(詩)같은 것이 글씨가 되어 꼼지락거리며 공간을 메운다. <무지개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것들>같은 작품은 제사용 사탕을 펼친 것 같이 유치한 색 바탕에 자작시가 무성의해서 자유로운 필치로 화면을 메우기도 한다. 먹도 버리고 새도 버리고 꽃도 버리고 커다란 화면에 커다란 글씨만 남는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거나 해도 되는 것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2007년은 홍지윤의 그림이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되어, 그의 기질과 작품이 간격을 줄여 이웃하게 된 해이다. 그가 애써 제약들을 벗어났는지 혹은 여러 가지 제약들이 더 이상 제약이 아닌 세상이 되었거나 개별적 제약, 예컨대 특정 미술운동이나 학파같은 제약이 실효를 다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튼 원색의 꽃과 자유로운 붓질, 정석이라고 여기는 공간구획이나 구성에서 홍지윤은 전면적으로 벗어났다. 그래서 자유를 얻었다기보다는 해방되었다. 작가 자신도 좀 더 행복해졌을 것이다.

 

 

획득형질과 자유

2010년 홍지윤은 서울에서, 2014년 홍콩에서 전시를 연다. 전시제목은 <Life is Colorful>이었다. 서울전시는 강남과 남산의 표화랑에서 동시에 열렸고 홍콩에서는 Landmark-north라는 쇼핑몰에서 였다. 서울 전시는 전시제목처럼 과하게 날것의 원색 꽃으로 도배를 했고 홍콩 전시는 그림의 꽃들이 뛰어나가 쇼핑몰 보이드 공간 여기저기에 설치되었다. 이제 색깔은 전시의 제목이 될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게다가 <인생은 화려하고 다채롭다>고 말한다.

2010년 남산기슭의 화랑 전시장에는 커다란, 물감 그대로의 원색의 꽃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서로 봐달라고 그야말로 난리가 아니었다. 전시장의 천장이 낮아서 더 그렇게 보였다. 수묵의 공간에서 수묵으로 그린 작은 새는 자유를 먼 여정 끝에 자유를 얻은 듯 했으나 –또한- 일견, 방향을 잃은 듯 했다. 기실, 자유라는 것이 일정한 방향이 있을 리 없겠으나 너무 멀리 왔거나 혹은 자유에 취해서 목소리가 너무 커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하리. 그림들은 전례 없이 생동감 있고 붓질은 자유로워졌으며, 그림과 글씨로 이루어진 화면의 의미관계는 가볍고 다층적으로 변했다. 시끄럽지만 유쾌한 그림이라고나 할까?

일전에 작가의 작업실에서 인상적인 그림 한 점을 봤다. <비 내리는 골목길>이라는 제목이 붙은 색동꽃과 모란과 그리고 수국과 라일락을 아크릴릭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분홍색 캔버스에 흰색을 주로 사용해서 그리고 20세기 초 중국 시인의 시를 옮겨 적었다. 비가 오는 정막한 골목길에서 라일락 같은 빛깔과 향기와 우수를 지닌 여인이 다가온다는 내용이란다. 이 시가 그림을 그리는데 영감을 준 듯싶다. 이 그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선 흰색을 근간으로 색을 배합하여 꽃들을 그렸다는 것이었다. 날것의 원색으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자유롭다고 외치던 작품들과는 다르게 조용히 그냥 앉아있는 듯 했다. 그래서 더 자유로워보였다. 두 번째는 그림의 구도가 전통적인 화훼도(花卉圖)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시인의 시가 만들어낸 아련함이 화면을 중성적인 색의 뽀얀 안개와 정석의 구도로 만들었을 수도 있고 작가의 예술의지가 변했을 수도 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어린 시절부터 작가의 몸에 쌓인 모든 것은 작가의 재산이다. 수목의 깊은 공간도, 활달하고 직선적인 기질이 만든 날것의 색들도, 작가가 가진 문학적인 기질이 만든 시들과 글씨도, 평생 봐왔던 오랜 그림들도 모두 작가가 획득한 형질이고, 그것이 자유롭게 발현되고 화면에 구현될 수 있다는 ‘단초’ 쯤으로 <비 내리는 골목길>이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스쳐 멀어져간다.

담담하게 가진 재주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최종적으로 작가들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프로가 되어야 한다거나, 직업윤리로서의 강령들이 새로운 생각을 제한하고 제도라는 측면에서의 예술이 작업에 ‘매진’할 것을 강요해도, 그 직선의 트랙에서 빗겨나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는 길이 쉽진 않겠으나 ‘그냥’ 그런 작가를 만나는 일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