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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Peng’ : 1998-2003 Paintings & animations

The 5th Solo Exhibition

움직이는 思惟 – 붕 鵬
1998-2003 Paintings & animations

5.24~6.3

한전프라자갤러리, ㅅㅓ울

“…한번을 날면 구만리를 나는 새 – 鵬”
저기 아래에 작은 새는 생각한다.
나는 조금만 날려해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는 어떻게 그 먼 거리를 한번에 날아 대체 어디로 가는가?…”
莊子. 逍遙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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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삶을 닮아있다.
그리고 그림은 思惟를 경험하는 시간에 비례하는 결과물이다.
결국 그림은 삶을 思惟하는 일이다.
思惟한다는 것은 개념을 의식하는 것이다.
긴 시간동안 나는 “순수하고 소박한 道란 영묘한 마음의 작용을 잘 지키는 일이다.”라는 말에 귀 기울여 왔다. 그리고 老子의 “大成若缺-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일그러진듯하며, 大直若屈-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大巧若拙-크게 정교한 것은 마치 서투른 듯이 보인다”라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나는 내 안을 관통하는 삶과 思惟의 흐름을 소박함과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는 순수함에 담아 꾸밈없이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이 깊어지고 난 후, 나에게 있어서 삶과 思惟의 해석은 유일하고 간단한 水墨의 표현에서 가장 적절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왜 그림을 그리냐?’고 물으면 나는 삶과 思惟의 기록을 남겨두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돌아서서 하루하루를 살면서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집요함과 시간의 흐름과 무거운 번뇌의 갈피들을 모두 흘려보내고만 싶은 무책임한 충동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마음과 생각을 느끼고 동양정신을 호흡한다는 일은 혼돈과 괴리감을 유발시키고는 한다. 때로는 어려서부터 공부해 온 동양화나 동양정신 같은 것 앞에서 마음들을 두어야할 자리를 몰라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이 지금껏 삶의 반 이상이었다면 최근에는 그러한 생각의 나머지 대부분이 그것의 반을 넘어 이제 동양정신을 肉化하기 시작했음을 보고 또 느낀다. 그리고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알려진 바 와같이 동양의 정신은 언제나 주의깊게 살펴보는 새, 달, 꽃, 사람, 나무들이 자연 그 자체임을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이러한 자연은 자연과 유리되어 문명의 극단을 달리는 현대에 있어서 가장 ‘궁국적인 컨텐츠의 알맹이’로, 나아가 미래를 말함에 있어서 ‘궁국적인 회귀점’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결국 지금의 나는 내 그림에 대한 생각들을 좀 더 긍정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껏 공부해온 시간과 노력에 적잖은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반면 좋은 그림이 요구하는 것 앞에서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明澄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조급하고 육중한 숙제들을 안게 되었다.
동양의 정신을 體得하고싶은 마음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孤獨의 상자에서 나오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 이 삶에서 무얼 얻고자 살아가고 있는걸까.
그리고 어떻게하면 ‘삶’ 이라는 고독의 상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는 원론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고민 해 왔다.
만약 새가 된다면….
자유롭게 고독과 완벽한 자유를 넘나들 수 있을 텐데….
누구나 한번쯤 해 보게 되는 생각, 想像들….
이러한 생각들을 그림으로 옮겨 나를 더 깊이 들여다 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까지 그려왔던 水墨그림 위에 새를 그려, 나를 날게 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지나간 시간과 그 시간에 따르는 심상의 새들을 하나의 화폭에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고 또한 동시에 모두 담을 수는 없을까?
결국 animation이라는 방법을 취하게 되었고 이러한 욕심들은 다섯달에 걸친 긴 장정으로 나를 안내했다. 1998년부터 2003년동안 그려온 “思惟의 門”또는 “思惟의 風景”으로 명명되어진 水墨그림들 중 새들이 가장 잘 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림들을 선별하여 컴퓨터상에서 매일 움직이는 새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무모할 수도 있는 고단한 노고를 반복하며 작업에 전념하였다.
2002년 4월에 시작된 이 작업은 완성을 보게된 8월이 되었을 때, jpg화일로 800여장이 되어 있었고 이 모든 새그림들을 이어붙여 “bird(鵬)”로 이름을 붙였다. 16분 분량이 된 하나의 그림 “鵬”은 ‘삶과 思惟의 기록’ 이며 내가 생각하는 ‘孤獨’에 대한 해석이 되어 있었다.
일상의 삶 – 병들었거나 건강할때의 육신, 에너지가 고갈되었거나 충만한 상태이의 정신, 그리고 상처를 입었을때의 마음 또는 그 상처가 치유된 평화로운 상태의 마음. “鵬”은 그런것들로부터 유발된 思惟의 결과물이다.
이제 움직이는 그림안에서 새들은 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작업이 끝났을 때에도 어떻게하면 ‘삶’ 이라는 고독의 상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유보된 채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작은 새이다. 그러나 내 안에는 큰 새 “鵬”이 있다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 해 본다.
삶은 나와 그리고 이미 또 다른 내가 되어버린 내 그림과 시간의 변주인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속을 스치는 아름다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머무는 깊은 아름다움을 위해서 삶을 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제까지의 것에 한발 앞서는 형태가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제 나는 나와 시간으로부터 明澄하게 객관화 된 그러나 육중하지 않고 새의 깃털처럼 가벼운 또 다른 의미의 삶과 그림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통과 동양정신을 부단히 의식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뇌리에서일정부분 잊어버린 상태에서 오히려 잠재되어진 그것들이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최소한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앞으로 남은 삶동안 나의 思惟는 계속될 것이고 내 안의 작은 새는 그 위를 날고있을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큰새 ‘鵬’이 대체 어디로 날아가는지 알게 될 것이고 어쩌면 내가 바로 鵬이 될 수도 있을것이라고 믿어본다.
부디 思惟가 유연하고 자유롭게 움직이기를 그리고 그 위의 작은 새가 깊은 아름다움을 가진 진정한 鵬이 되어 더 넓은 세상을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란다. ●
2003. 3. 15 홍지윤

<<Painting”思惟“>>

“점찍기” – “바다에 가져다 놓음”
스스로 그러함 : 혼돈속에서 만나는 우연과 변화

어떤 형태이든 조형의 법칙을 따를때, 예를들면 그림을 그리거나,
또는 물건의 위치를 배열하기전에 나는 습관처럼 종이를 꺼내서 점을 찍는다.
우리가 조형의 해석을 처음 배울때 구도나 비례…등을 배우게 되는데,
기본적인 조형의 요소인 점의 의미와 구조적 해석을 깨우치고 나게되면
그림그리기, 무언가를 만들기, 공간을 꾸미기에 어떠한 구속도 느낄 수 없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부터  아주 사소하고 근원적인 하나의 행위
– “점찍기”에 대해 생각한다.
물리적 결과로서의 평면적인 점의 개념을 아우르는 생리적,신체적
산물로서의 점의 생성은 곧 나의 그림이 되고, 어떠한 것이 되었든
조형 행위의 결과로 이끌어 가게 되는 근원이 되는것이다.
여기서 ‘점찍기’는 나에게 있어서 무작위의 공간에서의 방치,
또는 “가져다 놓음”에 다름아니다.
나는 이러한 점, 또는 무언가의 나열안에 내 근원,내 思惟의 세계,
내 행동을 뭉쳐 “가져다 놓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일상의 삶 – 병들었거나 건강할때의 육신, 에너지가 고갈되었거나
충만한 상태의 정신, 그리고 상처를 입은 마음 또는 그 상처가 치유된
상태의 마음 ………
그런것들을 망망한 바다의 한가운데에 띄우고
그리고 여러개의 점이된 나를 바라보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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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개인전 ………. 움직이는 思惟 – 붕 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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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개인전 ……. 움직이는 思惟 – 붕 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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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회 개인전 ….전시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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